[사회] 항의할 때 100달러, 뇌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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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스위스프랑 지폐를 들고 심판진에 항의하는 쇼트트랙 대표팀 김민정(왼쪽 둘째) 코치. ISU 규정에 따르면 판정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선 대표팀 지도자가 쓴 항의서와 100달러 상당의 현금(원 안)을 내야 한다. 현금은 무분별한 항의 방지를 위한 ‘보증금’ 격이다. [사진 JTBC 유튜브]
지난 10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혼성 계주 준결승. 경기 직후 김민정 한국 대표팀 코치가 심판진을 향해 긴박하게 내달렸다. 김길리가 미국 선수에 걸려 넘어졌으나 구제받지 못한 상황에 대해 공식 어필을 하기 위해서였다. 김 코치의 손에는 종이 한 장과 함께 현금 지폐가 들려 있었다.
비록 당시 한국의 순위가 ‘어드밴스(다음 라운드 진출)’ 기준인 2위가 아닌 3위였음이 확인되며 항의서가 실제로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중계 화면에 잡힌 이 ‘지폐’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왜 유독 쇼트트랙에서는 판정에 항의할 때 돈을 내밀어야 하는 것일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규정에 따르면 판정에 공식 이의를 제기(Protest)하려는 지도자는 직접 쓴 영문 항의서와 함께 100스위스프랑(약 19만원) 또는 그에 상응하는 현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는 무분별한 항의를 막기 위한 ‘공탁금’으로, 이의가 받아들여지면 돌려받지만 기각되면 연맹에 귀속된다.
다른 종목에도 유사한 규정은 존재하지만, 유독 쇼트트랙에서 지폐를 흔드는 장면이 도드라지는 이유는 이 종목 특유의 ‘속도감’과 ‘현장성’ 때문이다. 쇼트트랙은 판정이 확정되어 전광판에 ‘Official(공식)’이 뜨기 전에 항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심판이 고민하는 찰나에 감독이 달려가 현금을 내밀며 “공식 절차를 밟을 테니 판정을 확정 짓지 말고 다시 보라”고 쐐기를 박아야 하기 때문이다.
종목의 특성도 한몫한다. 축구나 야구는 경기 후 서면 항의를 하고 며칠 뒤 결과를 받아도 되지만, 쇼트트랙은 한 선수의 실격 여부에 따라 다음 라운드 진출자가 즉석에서 바뀐다. 다음 경기가 곧바로 이어지는 토너먼트 특성상, 흐름을 끊고 비디오 판독을 강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하고 즉각적인 수단이 바로 현금을 내미는 행위인 셈이다.
또한 쇼트트랙 항의는 ‘주관적인 반칙’보다는 기록지 상의 데이터 오류나 바퀴 수 계산 착오 같은 ‘객관적 증거’를 바로잡는 데 집중된다. 이런 오류는 현장에서 바로잡지 않으면 경기를 다시 치를 수 없기에 감독들은 주머니에 늘 현금을 준비해 두었다가 가장 빠르게 대응한다.
최용구 전 쇼트트랙 국제심판은 “지폐를 보여주는 것은 심판석과 코치 박스 사이의 거리가 멀고 시끄러운 경기장에서 항의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프로야구에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할 때 손으로 네모 모양을 그려 심판에게 전달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최용구 심판은 "일반적인 순위 관련 항의는 15분 안에 끝내야 한다. 진출과 탈락을 빨리 결정해야 하기 때문에 이의 제기 시간이 짧다"고 했다. 계산이나 바퀴 수 등에 관한 항의는 24시간까지도 가능하다. 최용구 심판은 "2023~24시즌 월드컵 당시 한국 여자 대표팀이 계주 1위를 하고 시상식까지 했지만, 다음 날 2위 네덜란드가 금메달, 한국이 은메달로 정정됐다. 당시 ISU가 한국의 남은 바퀴수를 잘못 계산한 걸 네덜란드가 항의해 결과가 뒤바뀌었다"고 했다.
항의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종목마다 다르다. 봅슬레이·스켈레톤은 200유로(17만원), 수영은 500달러(73만원)다. 펜싱의 경우 2012 런던 올림픽 당시 신아람의 '1초 사건' 당시 80달러(11만원)를 내고 항의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유도와 태권도도 보증금을 내지 않는다.
많은 종목이 ‘현금 공탁’ 대신 횟수를 제한하는 ‘챌린지 권한’ 시스템으로 전환하며 이미지 제고에 나선 것과 달리, 빙상 종목은 여전히 전통적인 ISU 규정을 고수하고 있다. 덕분에 1분 1초를 다투는 긴박한 빙판 위에서 제자를 구하기 위해 지폐 한 장을 쥐고 달리는 코치들의 모습은 쇼트트랙만이 가진 독특한 풍경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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