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남친? 밸런타인? 안 챙겨요"…요즘 뜨는 '갤런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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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를 닷새 앞둔 지난 9일 서울시내 대형 마트를 찾은 한 시민이 매장 진열대에서 초콜릿과 사탕 등 선물을 고르고 있다. [뉴시스]

“예전엔 이맘때면 가게 앞이 꽉 막힐 정도로 손님이 많았죠.”

밸런타인데이를 사흘 앞둔 지난 11일 오후 서울 을지로 방산시장의 한 제과제빵 재료 가게. 초콜릿 몰드(틀)를 정리하던 주인 박성경(52)씨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전부터 내리던 부슬비 탓인지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손님들로 북적이던 옛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시장 골목은 한산했다. 박씨는 “수제 초콜릿 재료를 사려고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섰던 건 다 옛날얘기”라며 “이젠 밸런타인데이라고 해서 딱히 다를 것도 없다”고 아쉬워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때까지 이성 교제는 사치죠.” 이날 오후 시장 골목에서 만난 취업준비생 강이서(28)씨는 다크 초콜릿 칩과 버터 등 홈 베이킹 재료를 손에 들고 귀가 중이었다. ‘연인에게 요리해줄 거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부터 쳤다. 대학 졸업 후 연애는 일절 하지 않고 있다는 강씨는 “홈 베이킹은 애인이 아니라 취업 준비에 지친 나 자신에게 선물할 디저트”라며 “기분 전환을 위한 취미일 뿐 이성에게 쏟을 시간은 없다”며 멋쩍게 웃었다.

연애를 사치로 여기는 건 강씨만이 아니다. 학업과 취업난 속에서 무한 경쟁 중인 20대 청년층 사이에선 이성 교제보다 자신의 삶을 더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MZ세대 내에서는 연애하지 않는 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습도 감지된다. 2024년 12월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에서도 19~24세 청년 중 78.9%, 25~29세 청년 중 58.3%는 이성 교제 상대가 없는 것으로 집계됐다. 더 나아가 현재 연애 대상이 없는 19~29세 청년 세 명 가운데 한 명(33%)은 앞으로도 교제할 의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창 이성에 관심이 많을 20대 청년 중 절반 이상이 연애하지 않는 사회. 이들이 이성 교제에 시큰둥한 이유는 뭘까. 데이터 컨설팅 기업인 피앰아이(PMI)가 지난해 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 소모’(52.6%)와 ‘경제적 부담’(39.6%)이 연애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주된 이유로 꼽혔다. 청년층 사이에서 시간과 감정 소모가 불가피한 이성 교제 대신 자신만의 확실한 즐거움을 선택하는 경향이 한층 뚜렷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는 사이 과거 연인들의 대표적인 기념일로 꼽혔던 밸런타인데이는 비연애 사회의 단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됐다. 연인 대신 동성 친구나 반려동물에 시간과 비용을 쓰는 MZ세대도 급격히 늘었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동성 친구들과 파티할 용품을 사러 왔다는 대학생 이수아(22)씨는 “같은 여자들끼리 재미있게 즐기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이라며 “요즘은 아예 하루 전인 2월 13일 갤런타인데이 파티를 여는 경우도 크게 늘었다”고 소개했다. 갤런타인데이는 걸(Girl)과 밸런타인데이의 합성어로 마음이 맞는 여성들끼리 모여 즐기는 날이라는 신조어다.

애견용 쿠키 재료를 사러 방산시장을 찾았다는 직장인 김시현(32)씨는 연애 대신 반려견과의 교감을 선택했다. 김씨는 “일이 몰릴 때면 퇴근 시간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들쭉날쭉한 근무 여건 탓에 이성 교제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었다”며 “특별한 날이라며 예약 전쟁을 벌이고 상대방이 만족할지 가슴 졸여야 하는 이성 교제보다는 항상 나를 기다려주는 반려견에 만족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성 교제에 부담을 느끼는 청년층들 사이에선 사회적 관계 플랫폼 활용도 크게 늘고 있다. 과거 이성 만남의 도구로 사용되던 데이팅 앱들도 ‘동네 친구 서비스’나 ‘관심사 기반 커뮤니티’를 내세우며 연애보다는 취미와 관심사에 방점을 찍는 추세다. 인근 공원을 함께 산책할 사람이나 새로 생긴 음식점에 함께 갈 사람을 찾아주는 식이다.

직장인 장지원(29)씨는 “앱으로 ‘두쫀쿠 홈 베이킹’을 검색한 뒤엔 딱 그때만 재밌게 놀고 헤어질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밸런타인데이 선물을 준비하는 것보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를 가진 동년배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만족감이 더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오랜 취업난과 경기 부진, 치솟는 물가 속에서 이성 교제에서도 ‘효율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개인적 취미나 자기 계발을 선호하는 흐름 속에서 이성 교제 역시 상대적 효율성을 비교한 뒤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리서치 업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10월 실시한 ‘2025 인간관계 및 연애관 인식 조사’에 따르면 ‘연애도 효율성을 따지는 시대’라는 데 74.9%가 동의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는 해외도 마찬가지다.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지난해 8월 미국 내 Z세대(1997년생 이후 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절반 이상(53%)은 지난 한 달간 데이트 비용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중국청년일보가 중국 내 대학생 1만4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0%가 비연애 상태라고 응답했다.

다만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사회적 관계 지표가 낮다는 점에서 우려가 더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세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도움이 필요한 경우 주변에 친구나 가족 등 기댈 곳이 있느냐는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한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가장 낮다”며 “연애하지 않는 사회도 이런 현실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면서 청년들의 사회적 연결 구조가 얼마나 건강한지 점검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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