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지우니 더 보이는 것들…별다를 것 없는 신문지에 남긴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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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산대로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최병소 개인전 '무제' 전시 장면. 'LIFE''ARTS' 잡지를 제호만 남긴 채 지워버렸다. 권근영 기자

전시장에 걸린 신문 경제면 머리에 코스피지수 1942.85가 눈에 들어왔다. 2015년 9월 26일 자 중앙일보다. 코스피 5000을 훌쩍 넘긴 11년 뒤의 불장을 그땐 누구도 상상 못 했겠지. 작가는 이 신문지에 자를 대고 사선을 그은 뒤  아래서부터 연필과 볼펜으로 선을 따라 그으며 지워나갔다. 온통 새카맣게 지워서 작가가 살짝 남긴 윗부분이 더 도드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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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무제 0151116 2015, 신문에 볼펜과 연필. 권근영 기자

최병소(1943~2025)의 ‘무제 0151116 2015’다. 완성한 날짜를 제목에 붙였으니, 대략 석 달쯤은 이 신문을 붙잡고 긋고 또 그은 셈이다. 긋고 또 그은 신문지 표면이 맨질맨질하다. 힘줘그었는지 군데군데 찢어진 곳도 있다. 지우다가 남겨둔 부분이 별다를 것도 없었을 그 날을 증언한다. 정보의 속도는 더 빨라져서, 이제 주식시세표를 싣는 신문은 없다. 하루 보고 버리는 신문에 영원한 삶을 부여한 작가도 이제 세상에 없다. 지난해 9월, 82세로 세상을 떠난 최병소의 첫 개인전 ‘무제’가 서울 도산대로 페로탕 갤러리에서 열린다.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남긴 작품 21점이 걸렸다.

최병소, 지난해 9월 별세 후 첫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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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 중인 최병소 © Choi Byung-So / Artist Rights Society, Korea 사진 페로탕 서울

1943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 직후 국민학교에서 신문 용지에 인쇄한 교과서로 글을 배웠다. 유네스코 지원으로 인쇄ㆍ배포한 신문지 교과서에는 ‘피란 학생에게 거저 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첫 신문과의 만남. 중앙대 서양화과와 계명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대미술 운동의 산실이던 1970년대 대구에서 활동, 독창적 조형 언어로 한국 미술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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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1943~2025) © Choi Byung-So / Artist Rights Society, Korea 사진 페로탕 서울

1975년 노점상에서 사들인 천수 다라니경 독경 테이프를 들으며 옆에 놓인 신문을 집어 활자를 지운 것이 평생에 걸친 ‘무제’ 시리즈의 시작. 검열이 일상이던 시대, 군데군데 지워진 신문이 시사하는 바는 컸다. 매일 스스로 지워나간 신문이 평생의 수행이 됐다.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모나미 153 볼펜 혹은 연필로 이미지와 언어를 검게 지운 곳에 새로운 시각적 질서를 구축했다. 작업은 그의 몸에도 흔적을 남겼다. 오른쪽 검지에 튀어나온 굳은살, 점처럼 박힌 검은 잉크 자국이 그랬다. 생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지루함을 몸으로 견뎌내는 것이 나의 작업. 신문 지우기는 이제 나를 지우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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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무제 0230305, 2023, 신문에 볼펜과 연필, 54.5x80x1㎝ 사진 페로탕 서울

이우환(90)은 2012년 대구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최병소에세 이런 축하 편지를 보냈다.

70년대 나는 최형의 작품을 보고 가슴이 쓰리고 아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군정 특유의 통제하에 모든 것이 얼어붙고 추상화된 시대에 저항은 끈질기게 노(No!)를 제시하는 일이었습니다…그런데 더욱 대단한 것은 그 시대의 공기가 사라진 지금 한국은 물론 때때로 일본이나 유럽에서 최형의 작품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저릿한 감명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때론 저항으로, 수행으로 읽혔던 그의 신문 지우기 작업은 정보의 홍수 속에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조차 가려내기 힘들어진 오늘날 더욱 빛난다. 매스미디어 속 넘쳐나는 언어를 지우고, 삶의 의미와 본질을 사유하게 하는 침묵만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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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도산대로 페로탕 서울에서 열리는 최병소 개인전 '무제' 전시 장면. 사진 페로탕 서울

온통 검은 종이들 틈에 새하얀 작품도 한 점 나왔다. 인쇄 전의 신문 용지에, 다 쓴 볼펜을 긁고 긁어 너덜너덜해진 ‘무제 0241029’다. 세상을 뜨기 1년 전, 작가가 남긴 침묵이다. 제호만 남기고 싹 다 지운 ‘라이프(LIFE)’와 ‘아츠(ARTS)’ 표지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평생에 걸쳐 시간을 지워나간 작가 대신 말하는 듯하다. 다음 달 7일까지,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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