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한국연극 정체성 만든 1세대 연출가 김정옥 별세

본문

btd5de1184aba436495b93d2593ead8db4.jpg

김정옥씨의 2011년 중앙일보 인터뷰 당시의 모습. 박종근 기자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국제극예술협회(ITI) 회장을 지낸 김정옥 연극연출가가 지난 17일 오전 별세했다. 94세. 우리나라 연극계 1세대 연출가로 꼽히는 고인은 60여년간 200여편의 연극을 연출하며 한국 연극만의 독창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32년 광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광주서중,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소르본대학 영화학연구소에서 영화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했다. 유학 당시 프랑스에서 만난 극작가 유치진(1905~1974)의 영향으로 연극과 인연을 맺었으며, 귀국 후 1959년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중앙대 강사 시절 이화여대 연극반 학생들을 지도하며 무대에 올린 연극 ‘리시스트라타’(1961)가 그의 첫 연출작이다.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햄릿’ 조연출을 거쳐 1963년 민중극장 창립 공연 ‘달걀’과 두 번째 작품 ‘대머리 여가수’를 연출했다. 이때 출연한 배우 중엔 박근형·오현주·김혜자·추송웅·박정자·김무생·권성덕·김정·구문회 등이 있다.

bt3f6ec9cbe886072806f68ff68c63387e.jpg

2016년 극단 자유 창단 50주년 행사 때의 모습. 왼쪽부터 최치림 극단 자유 대표, 이병복 무대미술가, 김정옥 연출가다. 중앙포토

1966년에는 한국 무대미술의 선구자 이병복(1927~2017)과 함께 극단 ‘자유’를 창립했다. ‘따라지의 향연’(1966)을 시작으로 ‘무엇이 될꼬하니’(1978)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국내 대표 연출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옥주·김혜자·최불암·박정자·김무생 등이 극단 ‘자유’ 단원으로 함께했다.

bt0fdd57aa15627f1be0c400090e95d879.jpg

극단 자유의 연극 '무엇이 될꼬하니'의 한장면. 중앙포토

고인이 평생 강조한 예술적 화두는 ‘한국 연극의 정체성’이었다.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무조건 서양 연극을 따라 하지 말고 한국적 문화유산을 최대한 연극에 도입해보자고 해서, 판소리며 무속·가면극·무술 등을 활용했다”며 그 결정체로 ‘무엇이 될꼬하니’를 꼽았다. 이밖에 ‘피의 결혼’(1985), ‘햄릿’(1993), ‘꽃, 물, 그리고’(2002), ‘19 그리고 80’(2003) 등이 고인의 대표작이다.

또한 고인은 ▶스태프들과 함께 연극을 만드는 ‘집단 창조’ ▶연극·무용·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장르와 기술을 총동원하여 표현하는 공연 형태인 ‘총체극’ ▶줄거리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장면을 이어붙여 하나의 의미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몽타주’ 기법 등 다양한 연극 연출을 시도했다.

고인은 1995년부터 2002년까지 국제극예술협회(ITI) 세계본부 회장을 아시아인 최초로 역임했다. 당시 그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이가 해외 교류에 가장 앞장섰다는 것도 어찌 보면 아이러니”라면서 “외국과 많이 일해본 사람이 자기 고유의 색깔을 찾게 된다”고 했다. 재임 시절 고인은 제3세계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다원성을 강조했다.

199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2000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2011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다. 2002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스 최고 등급 문화예술 공로 훈장인 꼬망드레를 받았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예술원상(1993), 최우수예술인상(1995), 일본 닛케이 아시아상 문화부문(1998),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2024) 등을 받았다.

btab0c78c20ca67a5b6fa0cf2d87105e56.jpg

경기도 광주에 위치한 얼굴박물관. 석인상 등 다양한 모양을 한 얼굴 작품 수천 점도 전시돼 있다. 중앙포토

2004년엔 경기도 광주에 ‘얼굴 박물관’을 열어 얼굴에 담긴 삶의 미학을 보존하는 데 힘쓰기도 했다. 이곳에는 동자석과 목각인형·와당·가면 등 1000여 점의 얼굴 조형이 전시돼 있다.

고인의 별세 소식에 손진책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은 “고인은 현대 연극의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 연극을 세계화한 분”이라며 “합리적이고 판단이 명석했던 분이셨다”고 추모했다. 유족은 부인 조경자씨, 자녀 김승미 서울예대 교수와 김승균 얼굴박물관 이사, 사위 홍승일 전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등이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20일 오전 7시 30분이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8,639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