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어느 강의에도 정치 이야기는 없었다…말라야대학 첫 풍경 [왕겅우 회고록-청년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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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에는 정치 이야기가 없어도 정치 생각뿐이던 새 대학
말라야대학에 도착한 것은 19세 생일의 바로 전날이었다. 말라야의 새 대학이 식민지인 싱가포르에 세워진다는 것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두 가지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들 했다. 기존의 두 대학을 활용하는 것이 시간과 비용을 절약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싱가포르 역시 머지않아 연방에 속하게 될 것으로 다들 기대하고 있었다.
대학교라고 하지만 아주 작은 규모였다. 문리대 신입생은 1백 명이었고 그중 이과는 40명,(실험공간의 제약 때문에) 문과는 60명이었다. 문과 60명 중 말라야 여러 주 출신이 40여 명이고 나머지가 싱가포르 출신이었다. 연방 출신 학생들은 교내나 가까이 있는 기숙사에서 지냈다. 싱가포르 학생 중에는 장학생 몇 명만 기숙사에 들어왔다. 그래서 기숙사생들은 싱가포르 학생들과 어울릴 일이 적었다.
여러 지방에서 온 학생들과 어울리게 된 것이 내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그들의 출신 지방에 관해 배우는 것이 즐겁고도 보람 있는 일이었다. 내가 가본 곳은 페락 주의 몇 개 도시뿐이었다. 지역 간의 상당한 차이가 내게 놀라웠고, 장래의 말라야가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하는 데 입체적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어느 강의에도 정치 이야기는 없었다. 교수는 공식적인 강의만 하면 되고, 정치 토론은 우리가 알아서 했다. 정치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활동적인 친구 몇이 식민지 경찰 특수부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그들 이야기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이듬해 가장 목소리가 높던 몇 명의 체포에 놀라 자빠진 것을 봐도 나는 정말 순진한 상태였다.
앤더슨학교 동창으로 의학부 3학년이던 친한 친구 옹쳉후이가 체포자 중에 있었던 것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1946년 우리 졸업반에서 수석이었고 정치에 아무 관심을 보인 일이 없던 친구였다. 그 아버지가 점령기 중에 일본인에게 살해당했고, 일본의 야욕을 격렬하게 비판하는 말을 들은 기억은 있다. 그 형과 함께 한 달 동안 구류당했다. 당국은 체포된 학생 중 말라야 출생이 아닌 학생은 가차없이 추방했다. 나처럼 말라야 출생 아닌 사람은 정치활동 참여나 반제국주의적 의견 표명에 더욱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옹쳉후이와 함께 체포된 학생 중에는 대학에 와서 만난 새 친구들이 있었다. 특히 제임스 푸투치어리와 돌라 마지드는 1년 반씩 수감되었다. 그들은 말라야공산당에 우호적인 지하조직 반영동맹(ABL) 회원으로 기소되었다. 내 보기에 두 사람 다 반-식민 주장에 거리낌 없는 친구들이었지만, 공산주의자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두 사람이 1952년 학교에 돌아오자 나는 제임스와 듀니언 로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며 캠퍼스 내의 정치 토론 권리를 위한 운동을 함께 계속했다. 우리는 영국 대학에서처럼 학생들의 정치단체 결성을 허용하도록 학교 당국에 요구했다. 학생들이 민주적 과정을 이해하고 말라야 국가에서 맡을 역할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1953년에 마침내 학교 당국이 이 주장에 동의하고 우리는 사회주의클럽(University Socialist Club)을 결성했다.
대학 캠퍼스에서 정치적 자유의 한계는 내게 낯선 문제가 아니었다. 정부가 학생운동을 매우 의심스럽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난징 대학생활을 통해 알게 되었었다. 1947년 6월 내가 난징에 도착할 때도 그 일대의 주요 대학 학생운동가 수십 명이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대학가가 비교적 조용했던 것은 누구를 믿어도 될지 알 수 없게 된 결과였다.
싱가포르에서는 영국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식민당국도 영국의 자유주의 전통을 존중해서 자유를 좀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정부를 위협하는 반란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반제국주의 정서의 공공연한 표출이 용납되리라는 기대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정치적인 생각은 마음속으로만 해야 한다는 자세를 배운 중국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공부하려던 문학은 누구의 문학이었나?
말라야대학으로 떠날 때 나는 다시 열린 공부길에 마음이 쏠려있었다. 애초의 내 생각은 이미 좀 알고 있던 방향, 난징에서 전공으로 했던 영문학 공부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하나의 공용어로 표현되는 말라야 문학이 말라야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영국인 교수 중에도 여러 계열 인구가 병존하는 복합사회에서 각 계열의 언어를 억제하고 함께 교육받는 공용어를 육성할 필요를 제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부각된 사실은 말레이인 학생 수가 적고, “엥말친(Engmalchin)” 즉 말레이화된 영어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은 더더욱 적다는 것이었다. 베다 림은 그런 문학의 장래에 관심을 가진 상급생의 하나였다. 내가 문학에 관심 가진 것을 알자 시 쓰기를 권하면서 자기 급우들과 함께 만든 래플스학회의 참여도 권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한 일인데, 내가 말라야 정체성에 접근할 하나의 기회였다.
시시한 장면에서 시작된 관계였다. 북쪽 지방 학생들은 대개 밤차를 타고 와 등록 첫날 새벽에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그 기차칸에서 신입생과 선배들이 만난다. 내가 처음 만난 사람 하나가 베다였다. 내가 영시에 관해 아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난징의 친구 주옌에게 T.S. 엘리엇과 W.H. 오덴에 관해 배운 것이 있어서 그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대답에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는데 아마 그 순간에 나를 데리고 놀 후배로 점찍은 것 같다.
문학의 관심이 내 길을 열어준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난징의 대학처럼 입학 때 전공을 정하는 제도가 아니었다. 세 개 전공을 골라 3년 공부해서 일반학위를 받고 그 후에 최종 전공을 골라 공부했다. 선택 범위가 좁은 데 실망했다. 문학 외에 역사, 경제, 지리만 있었다. 뭔가 쓸모있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경제를 골랐다. 다른 두 분야 중에는 역사 쪽이 사람을 다루고 문학에도 더 가까운 것 같아서 지리를 버렸다.
난징에서 외국어학과 다니면서 영국 고전을 꽤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분야는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싱가포르에 와보니 내가 잘 알지 못하던 영역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영문학은 내게 우선적인 분야였다. 난징 있는 동안 영문학의 역사에 잘 입문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그곳 친구들에게 유럽문학에 관해 배운 것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영문학의 배경이 있었고 그분이 구독하는 영국 주간지를 읽으면서 익숙한 분야가 되었다. 그 정도로 얼마나 부족한지는 오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입학하러 가는 길에 만난 베다 림이 내 자신감을 부풀려주었다. 그를 따라 래플스학회의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말라야 문학”에 관한 그들의 생각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이 나라가 진정한 독립을 이루려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싱가포르와 말라야가 합쳐져 새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들을 그 학회에서 만났다. 그런 나라의 문학은 어떤 것이 될까, 그들은 궁리하고 있었다. 말라야는 영국이 아니고, 우리가 영어로 작품을 쓰더라도 영문학의 모조품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그런 배척의 자세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시경에서 당송 시문까지 중국 고전문학과 삼국지, 서유기, 수호전 같은 대중소설에 익숙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풍성한 유산을 활용하지 않는 새로운 중국문학이라는 것이 상상되지 않았다. 궈모뤄(郭沫若)와 쉬즈모(徐志摩)의 시, 루쉰(鲁迅), 마오둔(矛盾)과 라오서(老舍)의 단편, 그리고 바진(巴金)의 3부작 〈家〉(1935), 〈春〉(1938), 〈秋〉(1940)를 읽어보았다. 어느 작품에나 분명히 유럽 사상의 자극이 들어 있지만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은 중국의 언어로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영어로 쓰는 작품이 영문학의 두터운 유산 위에 바탕을 두지 않을 방도가 있겠는가? 영문학의 전통에 따르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영문학을 공부한다는 기묘한 입장에 나는 서게 되었다. 과연 가능한 목표일지 확신이 서지 않았으나 가능할지 어떨지 친구들과 함께 확인해 보러 나섰다. 혹시 시를 쓰는 데는 가능한 범위가 있을지?
시인이 되어 보려는 노력을 통해 배운 것들
나를 정치에 아무 생각 없는 시인으로 키워주려는 베다 림의 노력 덕분에 당국의 심각한 사찰을 면한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는 내가 알던 누구와도 크게 다른 사람이었다. 부친은 하이난 출신이고 모친은 퍼라나칸으로 자라난 학까인데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중국식 말레이어(Baba Malay)로 썼다. 베다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데 영어는 능통했고 말레이어도 말과 글에 다 통했다. 부친은 유랑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베다 자신도 서양 고전음악, 특히 19-20세기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
베다에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사진기 수준의 정밀한 기억력이었다. 왜 그는 글을 쓰지 않는지 한 번 물어보자 뭐든 쓰려고 하면 읽었던 문장이 생각나 떨쳐버릴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보통이니까 글을 잘 쓸 수 있을 거라고 격려해 주었다. 내 첫 작품은 잠 안 오는 어느날 밤에 나왔다. 기숙사 계단에 앉아서 쓴 “Moon Thoughts”을 베다에게 보여주었다. 베다는 더 쓰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열두 편을 타이핑해서 작은 책자로 만들고 〈맥박(Pulse)〉이라는 제목을 붙여 배포했다. 1950년 4월의 일이었다. 지방신문에 보도가 되고 싱가포르에서 처음 발행된 시집으로 지목되는 바람에 우리 둘 다 놀랐다.
나는 영국 현대 시인들이 유행시킨 자유시의 영향을 받으며 말라야 사회를 특징짓는 복합사회의 이런저런 이미지를 포착하려 노력했다. 어떤 언어를 써야 할지 확실하지 않아서 영어의 기본 문장구조에 말레이어와 중국어 어휘들을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일부 교수들과 일부 동료 학생들의 눈에 시인으로 보이게 되었다.
1학년이 끝나갈 무렵에는 내 영문학 공부에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작업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있던 일이지만, 〈맥박〉에서의 내 실험이 나를 영문학 고전들로부터 나를 떼어놓았다. 엘리엇과 오덴, 그리고 딜런 토머스의 현대적 작품들을 “말라야문학”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문학 공부가 뒤집어진 것이었다.
그 현대 작가들을 나는 존경했지만, 그 혜택을 얻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고무받은 실험 방향은 우리가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스타일과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내가 쓴 것을 놓고 봐도, 영국적도 아니고 말라야적도 아닌 그 시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우리 토양에 의미 있는 뿌리를 박지 못하는 문학이 어떤 청중을 가질 수 있겠는가?
내가 끌린 것은 존 던과 그 동시대 사람들, 그리고 내가 열심히 읽던 워즈워스, 키츠, 콜러리지 등 낭만파 시인들 사이의 엄청난 차이였다. 내가 준비된 정도를 넘어 유럽 문화의 너무 깊은 곳으로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름다운 시인데도 그 바닥에 깔린 전제들이 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묘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어떻게든 견뎌내고 호메로스 작품과 소포클레스의 테베 시리즈 등 그리스 고전으로 넘어갔다. 번역된 글을 읽는 느낌이 중국 고전을 백화문으로 읽는 것 같았다. 심리적 작동방식이 비슷했다. 그 방식을 즐길 수 있었는데, 고전을 안다는 것이 후세의 영문 작품을 이해하는 길을 넓혀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경〉, 〈악부(樂府)〉, 〈고시십구수(古诗十九首)〉를 떠올릴 수 있을 때 당송시대 작품을 잘 감상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서양인의 마음의 눈이 형이상학적 전환을 키워내며 세계를 하느님의 선물로 보게 되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에 반응하도록 진화해 나가는 보편적 인류를 상상하는 시각이다. 뒤로 돌아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전통을 되돌아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 이제 유럽인이 누리게 된 새로운 자유에 대한 낭만파의 반응을 내다볼 수도 있는 시각이었다. 나 역시 신세계 안의 나를 발견했다. 그 신세계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현대시를 통해 영어로 구축된 세계에서 벗어날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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