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환율 또 17년만 최고…'고환율 뉴노멀'에 유학·여행·직구도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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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째 직구대행업체를 운영하는 A씨(35)는 지난해 말부터 한 달 매출이 60~70%가량 줄어 고민이다. 원-달러 환율이 올라(원화가치 하락) 제품 가격이 급등하자 단골들이 발길을 끊었다. 주로 미국·유럽의 생활용품이나 전자기기 선주문을 받은 뒤 구매를 대행하는데, 12만원대 해외 유명 면도기 제품이 17~18만원으로 오르니 고객들은 값이 훨씬 싼 국내 상품으로 눈을 돌렸다. A씨는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환율이 1400원대 초반이라 1450원을 기준으로 잡고 가격을 책정해왔다”며 “최근 환율이 급등하는 일이 잦아지자 주문의 90%가량이 취소되고 있다”고 말했다.
1500원대 고환율이 이른바 ‘뉴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일상 곳곳에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해외 직구나 여행을 취소하는 한편, 유학생들은 학비 부담에 비상이 걸렸다. 국내에 들여오는 원재료와 물류비가 오르면서 전반적인 생활물가 상승도 불가피해졌다.
23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1504.9원으로 출발한 원-달러 환율은 전장보다 16.7원 급등한 1517.3원에 주간 거래를 마감했다. 주간 거래 종가는 금융위기가 있었던 2009년 이후 17년 만의 최고치다. 환율은 이란·미국 전쟁이 시작된 지난달 28일 이후 급등락하면서 최고치를 계속해서 경신하고 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보다 375.45포인트(6.49%) 내린 5405.75로 마감했다. 사이드카(일시 거래 정지)가 발동될 정도로 거센 매도세가 환율 상승을 부추겼다.
김주원 기자
고환율 국면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자 소비 패턴부터 달라지는 모양새다. 평소 해외 직구로 의류를 구매해왔던 권 모(34) 씨는 “해외 브랜드가 세일한다고 해도 환율이 오르니 국내 백화점 가격이 더 싼 경우도 많다”며 “고환율 국면이 길어진다면 당분간 해외 직구는 이용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움직임은 카드사의 해외 온라인 가맹점 매출 데이터에서도 잘 드러난다. BC카드가 지난 2024년 1월 미국에서 발생한 온라인 매출금액을 100으로 두고 지수화했더니, 최근 석 달 사이 변화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지난해 12월(132.1)과 올 1월(133.7)에 증가세를 보이다 지난달(115.4)부터 감소세로 전환한 것이다. BC카드 관계자는 “지난해 연말 블랙프라이데이나 광군제 등 일부 이벤트 발생 시점에 매출이 반등했지만 가격 할인에 따른 일시적인 수요 집중 현상”이라며 “기조적으로는 환율 부담이 해외 직구 소비를 억제하는 흐름이 유지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챗 GPT나 넷플릭스 등 AI(인공지능)·OTT(동영상 스트리밍) 구독도 소비자들에겐 새 고민거리다. 요금이 달러 기준으로 책정되다 보니 환율 상승만으로 추가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장 모(35) 씨는 “구독하고 있는 서비스만 해도 3개인데 이참에 2개는 해지하려고 한다”며 “환율 상승으로 한 달 요금만 1만원이 오를 것 같은데 고물가 국면에 유지하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해외 유학생들도 부담이다. 미국 유학 학비와 생활비가 1년에 1억원 든다고 가정하면, 환율이 100원 오를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이 700만원이 넘는다. 서울의 한 유학원 관계자는 “미국의 경우 환율에다 비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유학생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며 “미국 대신 환율 부담이 그나마 덜한 호주로 가거나, 단기 어학연수는 아예 미루는 경우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 유학생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학비 부담에 전공을 공학 계열에서 자연과학계열로 바꿨다’, ‘부모님 부담을 덜기 위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는 내용의 글들이 잇따라 올라왔다.
환율 상승이 항공권 가격에도 시차를 두고 반영되면서 해외 여행객들도 국내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주요 항공사들은 다음 달부터 항공권에 붙는 유류할증료를 최대 3배 이상 올릴 계획이다. 올여름 베트남 푸꾸옥으로 여름 휴가를 계획하던 이 모(31) 씨는 “평소보다 훨씬 비싼 값에 비행기 표를 사기에는 왠지 억울한 마음”이라며 “환율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좋은 국내 숙소를 찾아 빨리 예약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계획을 바꿨다”고 말했다.
환율 상승은 국내 소비자들의 생활물가에도 영향을 미친다. 국제유가 상승이 전반적인 수입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어서다. 밀·소고기·커피 원두·코코아 등 주요 수입 원재료 가격이 오르면서 밥상 물가에도 비상이 걸릴 수 있다. NH금융연구소는 전쟁 영향이 3개월 이상 지속할 경우, 물가 상승률이 2~4%포인트 상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23일 오후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강정현 기자
고환율 국면은 한동안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 전망이다. 전쟁이 국제유가와 달러 강세를 촉발한 만큼, 지정학적 리스크가 근본적으로 해소돼야 원화 가치가 안정화할 것이란 분석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미국·이란 전쟁이 ‘에너지전쟁화’되면서 고유가 장기화 리스크가 현실화하고 있다”며 “달러 강세 기조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란 사태 추이와 유가 흐름이 외환시장 흐름을 좌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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