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Cooking&Food] 차례·생일상에 단골…세대를 이어 붙이는 빈대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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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용유에 돼지비계 섞어 부쳐
녹두 거칠게 갈아 식감 살아있어
단순한 전 아닌 ‘타이밍의 음식’
기억을 빌려온 입맛 ③ 빈대떡

가보지 못한 곳의 맛이 내 취향이 될 때가 있다. 실향민 3세대가 부모님의 이야기를 통해 물려받은 ‘기억 속의 식탁’을 기록한다. 그 세 번째는, 기름 향과 고소함이 어우러진 빈대떡이다.
“잘 불린 녹두를 물에 씻으면 껍질이 싹 벗겨지거든. 그러면 통에 담아다가 나한테 안겨주는 거야. 시장 방앗간에서 갈아오라는 거지. 떡도 해야 하니까 쌀가루도 빻아오곤 했는데, 그건 워낙 양이 많아서 언니, 오빠들이 들었고. 나는 항상 녹두만 딱 책임졌지.”
우리 어머니의 어린 시절 명절은 녹두가 가득 담긴 들통을 안고 방앗간으로 달려가는 아침으로 시작됐다. 돈이 넉넉하지 않던 시절, 대폿집에서라도 부쳐 먹기 전 실향민의 명절날 차례상에는 빼놓을 수 없는 빈대떡을 준비하는 첫 순간을 도맡은 심부름꾼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빈대떡은 어딘가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특별한 전이다. 노릇노릇 동그란 모양으로 푸짐하게 부쳐낸 녹두 빈대떡. 바삭하게 튀겨진 가장자리를 잡고 양념장에 찍으면 기름이 배어든 고소한 반죽이 입 안에서 포슬하게 풀리듯 부드럽게 부서진다.
부산에서 자라 만두를 빚지 않는 명절을 보낸 우리 집 차례상에도 가장 황금빛으로 빛나는 빈대떡은 늘 올라갔다. 시집온 집에 제사가 없어 조용한 명절이 낯설었던 어머니가 스스로 차례를 마련하며 실향민 2세대로 익숙한 빈대떡을 들여온 것이다. 주로 재료를 손질하고 산적을 예쁘게 꽂는 데 집중했던 나에게, 주방에서 어머니가 혼자 만들던 녹두 부침개 반죽은 여러 전 가운데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동태전이나 육전처럼 형태가 또렷한 전들 사이에서, 반죽을 그대로 부쳐내는 빈대떡은 어딘가 팬케이크처럼 낯설고도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낯섦이 오히려 더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고소하게 부쳐낸 빈대떡은 세대를 이어주는 음식이다. 사진은 광장시장의 순희네 빈대떡. [사진 정연주]
“방앗간에서 녹두를 갈아오면 어머니가 만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었어. 돼지고기 간 것도 넣고, 김치 다진 것도 넣고, 숙주도 넣고. 그릇에 담는 것도 돕고, 뒷정리하는 것도 거들다 보면 어머니가 고소한 자투리도 찢어서 입에 넣어 주시고. 그러다 사촌 동생들이 오면 어른들 귀찮지 않게 내가 데려가서 놀아주고 그랬지.”
평안도가 고향인 빈대떡은 기본적으로 녹두를 갈아 만든 반죽에 나물이나 김치, 돼지고기 등을 넣어 부친다. 우리 집에서는 강원도 원산 출신 실향민인 외할머니가 그랬듯이 숙주와 고사리를 넣었다. 어머니는 녹두를 갈아오려 방앗간까지 부리나케 뛰어가던 시절처럼 지금도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빈대떡을 부치지만, 다른 실향민 3세대의 기억을 들어보면 라드나 돼지비계를 조금씩 섞어 풍미를 더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재료의 차이는 있어도, 기름을 아끼지 않는 조리 방식만큼은 공통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다.
재미있는 것은, 다들 포장마차나 시장에서 튀기듯 만들어 파는 흔한 빈대떡에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프라이팬에 빈대떡 반죽을 부으면 옆에서 네모지게 자른 삼겹살을 가운데에 하나씩 꾹 눌러 붙이는 것이 일이었다고 회상하는 실향민 3세 B씨는 시판 빈대떡은 녹두를 너무 적게 넣고 지나치게 곱게 간다고 불평한다. 적당히 거칠게 갈아야 촉촉하게 씹히는 식감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개성 실향민 3세대인 C씨 역시 부모님을 모시고 빈대떡 집에 가면 반죽이 오래됐다거나 녹두의 수분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꼭 듣는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집에서 이어져 온 ‘기억 속의 기준’은 생각보다 엄격하다. 그 기준은 맛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을 어떻게 다뤘는지에 대한 감각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빈대떡은 단순한 전이 아니라 ‘타이밍의 음식’처럼 느껴진다. 녹두를 얼마나 불렸는지, 얼마나 굵게 갈았는지, 반죽을 언제 부쳤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두면 물이 빠지고, 너무 급하게 부치면 맛이 덜 오른다. 그 미묘한 균형이 결국 한 집의 빈대떡을 만든다.

동글동글 비슷한 모양으로 부쳐내기 때문에 할아버지 생신이면 과일이며 떡과 함께 높이 쌓아 올리기 좋았다는 빈대떡. 그날의 생일상을 담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가장 볼품 있는 음식이었다고 기억하는 어머니를 보며, 올해 생신 전날에는 녹두를 불려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돼지고기와 숙주, 김치를 듬뿍 넣고, 반죽이 삭기 전에 서둘러 노릇하게 부쳐내어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들으며 바삭한 한 입을 나누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어쩌면 나는 맛을 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때의 시간을 따라가 보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건너온 음식이 지금의 식탁 위에 다시 놓이는 순간, 그 빈대떡은 단순한 한 장의 전이 아니라 세대를 이어 붙이는 매개가 된다. 어머니의 특식이 결국 나의 특식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 기억의 맛을 한 번 더 되살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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