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50년 ‘축적의 시간’…대덕, K딥테크의 심장으로 부상 [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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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창업의 길 101. 대덕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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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플랫폼 전문기업 대전 레인보우로보틱스에서 25일 오후 허정우 CTO(최고기술책임자·가운데)와 연구원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축적의 시간’이 열매를 맺고 있는 걸까. 한국 과학기술의 요람, 대전 대덕이 K-딥테크의 심장으로 떠오르고 있다. 대학과 출연연의 연구실에서 시작한 스타트업이 상장기업으로 성장하고, 대기업 그룹에 편입돼 신성장 동력으로 자라고 있다. 대덕특구 내 코스닥 상장기업만 63개사에 달한다. 대덕은 연구단지로 시작했다. 1973년, 유성에서 첫 삽을 뜬 뒤로 표준연구원·화학연구원 등이 줄지어 들어섰다. 기업의 부족한 연구개발(R&D) 역량을 돕는 ‘산업화의 씽크탱크’가 대덕연구단지의 주목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업이 대덕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기업의 R&D 역량이 대덕을 넘어선 때문이다. 과제 수주로 인건비를 벌어야 하는 PBS제도, 실패를 용인 않는 평가제도 등도 악역을 했다. 대덕은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연구 성과는 ‘우수’한데, 쓸 곳이 없었다. ‘연구를 위한 연구’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추격형(fast follower)이 아닌 선도형(first mover) 연구로 체질을 개선하고, 그 연구 성과가 신산업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변화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래도 선구자들은 있었다. 제도와 환경이 따라주지 않아도 결실을 만들어냈다. 성공 사례가 하나둘 쌓이기 시작했다. 축적의 시간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휩쓸고, 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가 됐다. 판이 흔들리기 시작하니, 가려진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땅에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퍼스트 무버들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 25일 연구단지를 넘어 연구개발특구로 성장한 대덕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소룡’(小龍)들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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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왼쪽)을 끼고 펼쳐져 있는 대덕특구. [사진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휴보가 성장해 삼성그룹으로

연구단지의 동편 끝자락, 대전테크노밸리가 시작하는 대전 유성 문지동. ‘휴보 아빠’ 오준호 KAIST 교수가 2011년 창업한 로봇 스타트업 레인보우로보틱스의 3층짜리 사옥 앞이 주차된 차량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연면적 1만4830㎡(약 4500평), 7층짜리 세종 신사옥으로 이사하느라 분주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2021년 2월 코스닥에 상장하고, 2024년 12월 삼성전자가 지분 35%를 사들여 삼성그룹의 일원이 됐다. 로봇을 신성장동력으로 삼은 삼성의 오픈이노베이션 미래전략이었다. 주가는 한때 93만8000원까지 폭등했다. 코스닥 시총 순위는 5위(3월 27일 현재 시가총액 10조 9997억원). 오 교수의 제자인 최고기술책임자(CTO) 허정우 이사는 “2족과 4족 등 다양한 로봇을 개발하고 있고, 매년 50%에 가까운 매출 성장을 꾸준히 달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주인 오 교수는 레인보우로보틱스를 떠나 삼성전자 미래로봇추진단 단장을 맡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올해 안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공개할 예정이다.

대덕특구 내 상장기업만 63개사 #KAIST·출연연 기술 창업 이어져 #코스닥 상장에 대기업 편입도 #"대덕은 K딥테크 소룡들 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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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기 스탠다드에너지 대표가 바나듐이온배터리 셀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성태 객원기자.

레인보우로보틱스에서 북쪽으로 10㎞를 올라가니 스탠다드에너지 사옥이 나왔다. KAIST에서 기계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부기 대표가 2013년 창업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특화 이차전지 스타트업이다. 세계 최초로 화재나 폭발 위험이 전혀 없는 차세대 ESS 바나듐이온배터리(VIB)를 개발했다. 화재가 잦은 리튬이온 배터리의 단점을 극복한 독보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아 투자가 이어졌다. 소프트뱅크벤처스와 롯데케미칼 등으로부터 최근까지 1200억원의 누적 투자를 유치했다. 2021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테크놀로지 파이어니어 100개사’에 선정됐고, 지난해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글로벌 그린테크 250대 기업에 올랐다. 김 대표의 안내로 사옥 지하로 내려가니 생산라인이 나타났다. 연간 50MWh(메가와트시) 규모의 파일럿 라인으로, 기가와트(GW)급 대량생산으로 가기 전 초기 수요에 대응하는 설비였다. 이차전지는 통상 폭발 위험 때문에 지하 공간에서 생산을 할 수 없지만, 스탠다드에너지는 달랐다. 바나듐이온배터리의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김 대표는 “바나듐이온배터리는 급성장하고 있는 전기화 시대의 판을 바꿀 신기술”이라며 “기존 리튬이온 배터리가 지배적인 생태계를 파고드는 데 시간이 들긴 하지만 이미 기술검증 단계를 넘어 대전 지하철 구암역 등에 실제로 설치가 이뤄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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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 우주 스타트업 상장기업인 컨텍의 이성희 대표가 컨텍 본사 인공위성 관제실에서 자사 서비스를 설명하고 있다.김성태 객원기자

대덕에서 피어나는 한국 우주산업

유성 서쪽 지족동에 자리 잡은 컨텍도 찾았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출신 이성희 대표가 2014년 설립한 우주 스타트업이다. 컨텍은 세계 10개국, 13곳에 설치한 지상국을 보유하고 있다. 스타트업이지만, 지상국 시스템 설계부터 위성 영상 분석까지 수직 계열화를 이룬 국내 유일 기업이다. 최근 급증하고 있는 저궤도위성들이 주 고객이다. 관제실 벽 한쪽엔 가로·세로 4.92×2.1m의 우주관제 모니터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24년 3월엔 자체 위성 ‘오름샛’까지 쏘아 올렸다. 무게 26㎏짜리 초소형 저궤도 위성으로 지구관측과 광통신 기술 실증을 한다. 역시 항우연 출신 유장수 회장이 설립한 인공위성 제작기업 AP위성이 2024년 7월 계열사로 편입돼 사업부문이 넓어졌다. 두 회사 모두 코스닥 상장기업이다. AP위성은 2016년, 컨텍은 2023년 상장됐다. 서동춘 사장은 “우주는 이제 꺾이지 않는 산업이 됐다”며 “컨텍도 AP위성과 함께 최근 수년간 매년 30~40%씩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이오기업 알테오젠은 코스닥 대장주다. 올 초만 하더라도 코스닥 시가총액 1위에 올랐으나, 최근 삼천당제약·에코프로 등과 함께 1위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알테오젠은 번거로운 정맥주사를 간단한 피하주사 제형으로 바꾸는 '하이브로자임' 기술로 글로벌 제약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게임 체인저'다. 지난해 3월 아스트라제네카와 2조원 규모의 원천기술 독점 라이선스 계약을 했고, 올해도 지난 1월 미국 GSK 자회사 테사로와 4200억원 규모의 기술수출을 했다. 전태연 대표는 “우리와 계약한 글로벌 제약사들이 그들의 기존 블록버스터 약에 우리 기술을 얹어 제형을 바꾸는 구조라 기술이전 후에도 로열티가 안정적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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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유성구 전민동의 알테오젠 본사 및 연구소 전경. [사진 알테오젠]

대덕특구의 비상은 수치로 증명된다. 특구 내 코스닥 상장사 63개의 총 시가총액은 약 72조원에 달한다. 코스닥 전체 시총(625조 원)의 11.5%를 차지한다. 존재감은 시총보다 더 뛰어나다. 코스닥 시총 상위 10개사 중 알테오젠·레인보우로보틱스·리가켐바이오 등 3개사가 특구 기업이다. 대덕은 이미 스타트업 생태계 구축 수준을 넘어 성장의 한계에 부딪힌 대기업의 신성장 엔진 역할에도 나서고 있다. 삼성에 편입된 레인보우로보틱스만이 아니다. KAIST 인공위성연구소 출신들이 1999년 창업한 쎄트렉아이는  2014년 상장을 거쳐 2021년에 한화에어로스페스의 자회사가 됐다. 코스닥 시총 상위 10위권인 리가켐바이오도 2024년 3월 제과기업 오리온의 일원이 됐다.

대덕 생태계에 녹아든 LG화학 출신들

상장사들의 화려한 기록 뒤에는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비상장 딥테크' 군단이 포진해 있다. 정명수 KAIST 교수가 창업한 파네시아는 창업 2년 만에 누적 투자 1000억 원을 달성하며 AI 반도체의 병목 현상을 해결할 차세대 규격을 세계 최초로 제시했다. 이정호 KAIST 교수가 창업한 소바젠은 '체성 돌연변이' 기반 난치성 뇌전증 치료제를 개발했다. 지난해 9월 이탈리아 안젤리니파마와 약 7500억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성사시켰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김형우 대표가 2016년 창업한 블루타일랩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초정밀 펨토초 레이저 광원을 100% 국산화하며 반도체와 2차전지 공정의 디테일을 완성하고 있다. 대덕특구엔 R&D 기술사업화의 이단아 같은 기업도 적지 않다. 이른바 LG화학 사단이다. 대덕 내 첨단 바이오 상장사 중 약 21.2%의 대표자가 LG화학(옛 LG생명과학) 출신이다. IMF 외환위기로 대덕 내 기업 연구소들의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있을 때 퇴사한 연구인력들이 대덕 혁신 생태계에서 다시 싹을 틔웠다. 노키아가 무너진 핀란드가 딥테크 스타트업들의 성지가 된 것과 유사한 사례다. 리가켐바이오와 알테오젠· 펩트론 등이 LG 출신들이 세운 회사다.

정희권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은 “대덕특구내 연구소와 대학의 기술이전은 매년 늘어 2023년엔 2021건을 기록할 정도로 K-딥테크의 원천이 되고 있다”며 “중국 항저우에 알리바바를 필두로 한 '6소룡'이 있다면, 대덕에는 세계 시장을 호령할 'K-딥테크 소룡'들이 부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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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의 혁신창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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