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더버터] 퇴직 교사들, 경계선지능 아이들의 ‘골든타임’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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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클로·아이들과미래재단
느린학습자 멘토링 ‘천천히 함께’
‘천천히 함께’ 사업 참여 아동이 퇴직 교사 멘토와 수업을 하고 있다. [사진 유니클로]
학기 초가 되면 마음이 더 분주해지는 부모들이 있다. ‘경계선지능’ 자녀를 둔 부모들이다.
“문제를 다 못 풀었는데 선생님이 그냥 넘어가서 속상했어요.” “친구들이 저를 따돌리는 것 같아요.” “교실에 들어가면 불안해져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말 앞에서 부모는 새 학기 교실이 높은 벽처럼 느껴진다.
지능지수(IQ) 71~84의 경계선지능 아동은 지적장애 기준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평균보다는 지능이 낮아 학습과 또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학기 초마다 부모들은 새로운 담임 교사에게 아이의 특성과 어려움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생각에 부담을 느낀다. 우리나라 초중고 학생 483만 명 중 13.6%, 약 65만 명이 경계선지능인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초등학교 6학년 민서(가명)도 이런 아이 중 한 명이었다. 조용한 성격의 민서는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수업을 따라가기도 버거워졌다. 보충 수업을 위해 등록한 학원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부모가 직접 가르쳐보기도 했지만 딸이 기대만큼 따라오지 못할 때마다 속상한 마음에 자꾸 짜증을 내게 됐다. 아이는 더 위축되고 엄마의 자책은 깊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변화는 민서를 다그치지 않는 어른을 만나면서 시작됐다. 퇴직한 선생님 멘토였다. 한 학년 아래 교재부터 다시 풀기로 했지만, 선생님은 문제를 빨리 푸는 것보다 끝까지 해내는 과정을 더 크게 칭찬했다. 민서는 일주일에 한 번 멘토를 만나며 마음이 안정되고 공부에도 흥미를 느꼈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일반 학원에 다니며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고 있다.
유니클로와 아이들과미래재단이 2023년부터 운영 중인 ‘천천히 함께’는 경계선지능 초등학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퇴직 교원과 느린학습자 전문교사 등이 읽기·쓰기·셈하기 등 기초학습을 위한 맞춤형 교육을 제공한다. 지난 3년간 지원한 아동은 누적 699명, 참여 멘토는 339명에 달한다. 이들은 2만990회의 만남을 통해 자신만의 속도로 학교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갔다.
아이의 속도를 기다려주는 어른
경계선지능인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어려움을 겪는다. 읽기, 쓰기, 셈하기 등 어려워하는 인지 영역이 각자 다르다. 사회적 상황 파악이 느려 또래 관계를 힘들어하기도 한다. 천천히 함께 멘토들은 개별 아이의 상태부터 파악한다. 기초학습능력 진단 후 필요하면 아래 학년 교재부터 시작한다. 긍정적인 정서와 표현력 향상을 위해 미술치료나, 소근육 발달 키트도 활용한다. 매주 한 번씩, 방과 후에 학교나 지역아동센터 같은 기관에서 총 30번의 수업이 진행된다.
멘토 중 절반 이상은 오랜 교직 경험을 갖춘 퇴직 교사들이다. 교단에서 수십 년간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가 왜 시선을 피하는지, 어떤 대목에서 학습이 막히는지 빠르게 읽어낸다. 조급하게 다그치기보다 아이의 속도에 맞춰 기다려주고, 작은 성취에도 아낌없이 칭찬하며 신뢰를 쌓아간다. 이윤훈 멘토는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채점할 때 일부러 크게 동그라미를 쳐주면서 칭찬했다”며 “아이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만에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느린학습자 전문교사와 교대 학생 등이 각자의 전문성을 살려 멘토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원 대상을 초등학생으로 두는 이유는 이 시기가 경계선지능 아동 지원의 ‘골든타임’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성인기까지 이어지는 문해력과 수리력의 기초가 대부분 초등학생 시기에 형성된다. 초등 1~3학년 시기는 성장과 학습의 속도가 특히 빠르다. 경계선지능 아동과의 격차는 이때부터 벌어지기 시작한다.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가능한 이른 시기에 개입해야 결손이 누적돼 또래와의 격차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서 “인지적 제약으로 인한 학습 격차와 소외감은 우울, 불안, 무기력 같은 정서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민간이 메운 경계선지능 사각지대
문제는 경계선지능 아동을 조기에 발견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또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다가 특정 상황에서만 난관을 겪어 부모나 교사는 성향의 문제로 여기고 지나치기 쉽다. 사회적 인식이 낮다 보니 부모가 이상 신호를 감지해도 주변에서 “예민하다”거나 “굳이 진단까지 받아야 하느냐”는 소리를 듣기 일쑤다. 결국 발견도, 개입 시점도 늦어진다.
경계선지능 아동 지원은 한동안 기업 사회공헌에서 중심 의제로 다뤄지지 못했다. 성과가 단기간에 드러나기 어렵고, 법적·행정적으로도 명확한 범주로 분류되지 않아서다. 유니클로가 이 사업에 나선 건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가던 2023년이었다. 비대면 수업이 장기화되면서 아이들의 학습과 사회성 결손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경계선지능 아동의 격차는 더욱 심화됐다. ‘미래세대’를 키워드로 글로벌 사회공헌을 추진해 온 유니클로는 새로운 사각지대 문제를 함께 풀어보자는 아이들과미래재단의 제안으로 ‘천천히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지난 3년간 유니클로는 약 31억원을 투입했다. 공무원연금공단과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도 은퇴 교사들을 연결하며 힘을 보탰다. 사업은 1대1 맞춤형 교육을 넘어 그룹 프로그램과 부모 역량 교육으로 확대됐다. 올해 4차년도 사업에서도 약 12억원 규모의 지원을 이어갈 예정이다.
지난해부터는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김동일 교수팀이 지원 아동을 대상으로 종단연구를 진행 중이다. 3차년도 사업 분석 결과 기초학습능력 백분위 점수는 21%에서 42%로, 즉 100명 중 79등에서 58등으로 상승했다. 향상 폭은 초1 아동에게서 가장 컸다. 자기 관리, 사회적 인식, 관계 관리 등 사회정서역량 검사에서도 전 영역이 고르게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부터는 사업 지역을 수도권에서 부산으로 확대한다. 이훈규 아이들과미래재단 이사장은 “NGO가 사회문제를 발견하고, 기업이 후원해 해결 가능성을 증명하고, 이후 정부가 세금으로 영향을 확대하는 것이 기업 사회공헌의 선순환”이라며 “이번 사업을 통해 느린학습 아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대되고 공교육의 정책으로도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니클로 본사인 패스트리테일링의 닛타 유키히로 서스테이너빌리티 담당 그룹 집행임원은 “유니클로는 전 세계 26개국에 진출해 현지 지역사회와 공존하며 미래의 주역인 아동·청소년 지원을 위한 사회공헌을 펼치고 있다”며 “‘천천히 함께’와 같은 사업을 통해 앞으로도 한국 사회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가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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