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데뷔 50주년 맞아 월드투어 하는 윤수일...“로제와 합동 공연, 내 로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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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수일이 1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아직도 사랑 받은 걸 다 못 돌려 드렸어요. 77년 데뷔부터 공전의 빅히트를 쳤기 때문에…. 그런 가수가 잘 없어요. 참 감사한 일이지. 아, 그리고 일정 맞으면 (해외에 있는) 로제양과 협업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제 로망입니다.”

가수 윤수일(71)이 데뷔 50주년 기념 월드 투어 계획을 밝히며 이렇게 말했다. 또렷한 쌍꺼풀만큼이나 깊어진 주름이, 말간 웃음과 함께 그의 하얀 얼굴을 물들였다.

윤수일이 오는 5월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월드 투어 ‘디 오리지널’에 나선다. 내년 초까지 미국 7개 주, 일본 5개 도시, 호주 시드니 등을 순회하며 해외 팬들을 만난다. 지난 1일 중앙일보 상암사옥을 찾은 그는 “15년 만의 투어 연습과 홍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면서도 “살아있다는 것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살아있다는 것으로’는 그가 지난해 발표한 자작곡 제목이다.

여전히 수트 핏이 멋있다.  
평소 ‘3쾌’를 실천하며 산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배출한다. 밥 거르지 않고, 잠은 꼭 6시간씩 자려고 한다.  
목소리도….  
한때 ‘노 스모킹 노 뮤직’ 이었는데, 세월 앞에 장사 없다. 관리해야 한다. 두 갑씩 피우던 담배를 끊은 지 벌써 20년도 더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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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수일 월드투어 콘서트 포스터. [사진 레전드엔터테인먼트]

50년 전 윤수일은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었다. 1977년 데뷔 곡인 트로트 ‘사랑만은 않겠어요’는 그해 최고의 앨범 판매 기록을 세웠고 MBC 등 각 방송사가 뽑은 1978년의 히트곡으로 선정됐다. 윤수일은 “어릴 때 겪은 가난과 설움을 한꺼번에 보상 받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데뷔곡 가사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닮았다고 했는데.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했다.  
아버지가….
주한 미군 조종사였다. 어머니는 그가 돌아오기로 약속하고선 미국에 갔다 죽었다고 했다. ‘양키’ ‘아이 노꾸(초록색 눈)’라고 손가락질 받던 내 외모가 어디서 온 건지 궁금해 어릴 때 어머니에게 물어봤다. 답을 들은 후엔 어차피 날 버리고 떠난 사람이니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어린 시절 맘고생 깨나 했겠다.
매일 같이 우리 집 앞에 미군들이 와서 해외 입양을 독촉했다. 이사 간 동네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땐 이래저래 많이 싸웠다. 하도 외모 갖고 놀리니…. 기업이고 공장이고 내가 혼혈이라 안 뽑아 준다고 했다. 혼혈이라 병역 의무도 면제였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는 고민을 어렸을 때부터 했다.  
어머니가 강인하다.
엄마는 6·25 전쟁 통에 북에서 피난 오며 모든 가족을 다 잃었다. 그래도 체력도 좋고 낭만이 있는 분이셨지. 웃풍 가득한 초가집에서, 밤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틀어놓고 엄마와 이런 저런 음악을 들었다. 그 덕에 내가 바르게 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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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동양방송 제14회 가요대상 수상자들. 왼쪽부터 혜은이, 산울림, 윤수일, 이은하. 윤수일은 오똑한 콧날과 짙은 쌍꺼풀 등 이국적인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중앙포토]

그에게 윤씨 성을 물려준 건 윤수일이 초등학교 갈 무렵 어머니와 결혼한 새아버지다. 평범한 울산의 농부였던 그는 윤수일이 가수의 길을 걷는다고 했을 때 기타를 부수며 열렬히 반대했다. 그럴 때마다 윤수일은 막노동 공사판으로 달려가 악기 살 돈을 벌었다. “울산에 있는 웬만한 대기업 공장들은 내가 다 지었다”며 웃었다.

언제 음악하기로 결심했나.  
고 1 때 소풍 장기자랑에서 기타치며 애니멀스의 ‘해 뜨는 집’을 불렀는데 반응이 난리가 났다. 그 길로 온갖 방황을 정리하고 음악 하기로 맘먹었다. 남들 학원 갈 때 나는 친구들을 모아 ‘앤젤스’라는 밴드를 결성했다. 매일 연습을 하고 밤마다 클럽 공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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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수일의 젊은 시절 활동 모습. 오똑한 콧날과 짙은 쌍꺼풀 등 이국적인 외모로 주목을 받았다. [중앙포토]

상경은.  
어머니가 서울에 혼혈인들로 구성된 ‘골든 그레입스’란 밴드가 있단 소식을 접하고 내 신상을 적은 편지를 그쪽에 보냈다. 매니저가 울산으로 찾아와 서울 가자고 했다. 그 길로 짐 쌌다.  

골든 그레입스 멤버로 한 경연 대회에 나갔던 그는 안치행 프로듀서의 눈에 들어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했다. 이후 자작곡 ‘아파트(APT)’ ‘황홀한 고백’ ‘아름다워’ ‘터미널’ 등이 히트를 치며 단숨에 국민 가수 반열에 등극했다.

록과 트로트가 접목된 노래들로 히트했다.
당시에도 센세이셔널한 조합이었다. 나는 우리 걸 집어치우고 블루스 록만 하겠다는 동두천, 의정부 밴드들이 맘에 안 들었다.
‘아파트’는 어떻게 만들었나.
친구 얘기다. 그가 군대 갔다 돌아와 보니 여자친구 가족은 연락도 없이 외국으로 이민 간 상태였다. 아파트 초인종만 누르다 결국 돌아와야 했다. 그 씁쓸함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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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가요대제전 무대에 선 윤수일과 후배 가수들. [유튜브 캡처]

그는 ‘아파트’에 대해 “운동장(응원가), 노래방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노래”라며 “여기에 로제가 또 한 번 생명력을 연장해줬다”고 했다. 로제가 부른 ‘아파트(APT.)’의 인기는 원조 격인 윤수일의 노래까지 관심을 끌게했다. 윤수일에게 ‘(아파트) 구조합장’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신조합장’ 로제에 대응하는 별칭이다.

로제의 ‘ 아파트’ 가 대히트 했다.  
요만큼은 섭섭했다. 나한테 말도 안하고….(웃음) ‘APT’ 세 글자는 영어 단어 사전에도 안 나온다. 아마 로제양이 어린 시절 내 노래를 듣고선 붙인 제목 아닐까.
그 덕에 후배들과 연말 시상식 무대(2024년 KBS 가요대축제 글로벌 페스티벌)에도 섰다.
일종의 슬럼프가 있었을 때 섭외 전화를 받아서 기뻤다. 내가 뒤에서 등장하고 앞에 서있던 후배들이 일제히 갈라서서 길을 터주는 연출의 무대였다. 후배들이 노래를 다 따라 불러줘서 감동이었다.

이번 월드 투어 공연에서도 ‘아파트’를 들을 수 있다. 윤수일은 “히트곡뿐만 아니라 피아노 치며 팝송도 부르는 등 특별한 공연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미래를 예상했었나.  
신기하다. 어렸을 땐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콧대를 누르며 제발 한국사람 같아져라 했는데, 이젠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코를 높이고 쌍커풀을 만들려 수술을 하고 있다. 이런 현재의 모습에 옛날의 내가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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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윤수일이 1일 상암동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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