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흙을 쓸듯 종이에 그렸다”…‘농부 아들’ 이배의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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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는 원주 뮤지엄 산 정원 ‘무(無)의 공간’에 높이 11m 브론즈 조각 ‘붓질’ 6점을 세웠다. 미술관 건물 높이만큼 숯을 탑처럼 쌓아올린 모습이다. 사진 뮤지엄 산
저는 황토에서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그림 그리는 것이 (빗자루로) 흙을 쓰는 것과 그렇게 차이가 있다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6일 오전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 전시장에 깔린 흙을 맨발로 밟으며 이배(70)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손에는 싸리비를 들었다. 뒤에 높이 9m 화면에서는 그가 지난해 5월 고향인 경북 청도에서 촬영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흑백 화면에 비치는 그의 붓질이 전시장의 비질과 만났다. 흙에 쟁기질하듯, 흰 종이에 몸으로 큰 붓 밀고 나간 인생이다. 고향의 밭에서 퍼온 흙에선 전시가 열리는 8개월 동안 무엇이 자랄까. 전시를 보고 난 관객들 마음속에선 무엇이 자랄까.
안도 다다오 미술관 뮤지엄 산, 숯 기둥으로 가로막아
6일 뮤지엄 산에서 이배(70)가 싸리비로 흙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종이에 큰 붓으로 그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원주=권근영 기자
뮤지엄 산에서 이배의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가 12월 6일까지 열린다. 안도 다다오(85) 설계로 2013년 개관한 이 미술관에서 한국 미술가의 개인전은 처음이다. 이배는 30여년간 숯으로 조각하고 그리며, 수묵의 여백을 구현해 온 미술가다.
뮤지엄 산 청조갤러리 3에서는 이배의 고향인 경북 청도의 밭에서 퍼온 흙을 깔고 9m 스크린에 13분 5초 영상을 상영한다. 원주=권근영 기자
장남이 화가가 되겠다 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화를 냈다. “평생 일군 땅을, 농업을 그럼 누구에게 물려주란 말이냐” 허탈해했다. 이배는 1982년 홍익대 미술교육과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가 1989년 파리로 이주했다. 전환점은 재료비를 아끼려 슈퍼마켓에서 산 바비큐용 숯이었다. 숯에서 고향의 흙과 나무, 정월 대보름의 달집태우기를 연상했고, 소멸을 거쳐 새로운 에너지를 응축하는 생명력을 발견했다. 동양적 사유를 현대 미술에 담는 그는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23),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2018),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0년)을 받았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원주 뮤지엄 산 본관 입구를 가로막듯 설치한 '불로부터(Issu du feu)'. 사진 뮤지엄 산
전시에서 맨 처음 만나는 작품은 7톤 숯 기둥. 안도 다다오의 미술관 입구가 8m로 쌓아 올린 숯 기둥 ‘불로부터’에 가로막혔다. 3년 전 뉴욕 록펠러센터 앞에 설치한 6.8m 높이 숯 조각의 확장판이다. 이배의 설명이다.
4년 전 큰 산불이 난 다음 날 강원도 고성의 화재 현장을 찾아갔어요. 록펠러 센터에 큰 조각을 세울 때도 캐나다에서 산불이 난 뒤였죠. 이 재앙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회복과 치유의 염원을 담았습니다.
전시장 로비에는 ‘붓질’ 16점을 풍경처럼 엇갈려 설치해 산책하듯 보게 했다. 숯가루를 이겨 만든 안료를 먹처럼 찍어 그은 대형 회화다. 화가의 붓자국이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의 빛과 만난다.
원주 뮤지엄 산에서 대규모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를 여는 이배. 왼쪽 작품은 스테이플러 3만5000개를 찍어 만든 '붓질'. 사진 뮤지엄 산
총 39점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미술관 입구부터 전시장 로비, 3개 전시장, 그리고 정원에 걸쳐 이배의 세계를 회화·조각·영상설치로 보여주는 대규모 회고전이다.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선보인 이배의 개인전 ‘달집태우기’의 원점 회귀다.
스테이플러를 찍어 만든 '붓질'의 세부. 원주=권근영 기자
청조갤러리 1의 벽과 바닥을 흰 종이로 도배하고, 흰 조형물을 놓았다. 벽에는 작가가 직접 3만5000개의 스테이플러를 찍어 ‘붓질’ 형상을 만들었다. “전시장에 걸려야 할 그림을 밖으로 비워냈다. 흰 종이 도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아, 스테이플러를 찍어 만든 ‘붓질’로 드러나게 했다”고 이배는 설명했다. 청조갤러리 2는 숯의 방이다. 바닥의 붓질, 쌓아둔 숯더미가 강과 산처럼 이어지게 했다. 소나무·버드나무·참나무 등 고향의 나무를 구운 숯에서 나온 안료는 나무마다 색감과 밀도가 조금씩 다르다.
미술관 청조갤러리 2는 숯의 방이다. 벽과 바닥에 종이를 발랐고, 숯으로 된 안료로 붓질하고 숯더미를 쌓았다. 원주=권근영 기자
미술관 밖 정원 '무(無)의 공간'에는 숯을 탑처럼 쌓아 올린 형태의 높이 11m 브론즈 조각인 '붓질' 6점이 섰다. 이배는 “그 조각으로 인해 산과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이 더 잘 보이면 좋겠다”며 “예술은 생소한 것이고,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고, 처음의 만남이다. 생소해도, 예술이기에 용납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그에게 귀향이다.
외국 왔다 갔다 하면서 떠돌이처럼 40년을 살다 보니 고향으로 돌아온 느낌입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작가로 무엇을 꿈꾸며 지금까지 왔는지 돌아볼 계기가 됐습니다.
농부의 아들이라는 삶의 기반 위에서 예술과 노동, 자연의 관계, 나아가 생명과 순환,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다. 그리하여 전시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관객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이뤄지고 있는가’ 묻는다.
제게 뮤지엄 산은 현대적인 수도원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무엇을 봐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천천히, 무언가 느끼면서 이 공간을 지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뮤지엄 산은 한솔그룹 고문을 지낸 청조 이인희(1928~2019)의 개인 컬렉션에서 출발했다. 전시관 이름에 붙은 청조는 그의 호다. 빛의 예술가 제임스 터렐(83), 영국 조각가 안토니 곰리(76)의 별도 상설 전시 공간이 있다. 성인 2만3000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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