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대학생 ‘실패할 권리’ 보장…이 나라 우주 최강 된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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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현지시간) 스위스 취리히 혁신센터 내 취리히연방공대(ETH) 부스에서 발표를 진행 중인 학생 주도 우주 연구팀 ‘아리스(ARIS)’ 소속 리차드 루딘. 전민구 기자

지난달 23일(현지시간) 스위스 취리히 혁신센터 내 취리히연방공대(ETH) 부스. 이곳은 학생 주도 우주 연구팀 ‘아리스(ARIS)’ 팀원들이 뿜어내는 토론 열기로 가득했다. 인공위성과 로켓, 로보틱스라는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 중인 아리스는 2017년 “강의실 안에서도 실무의 문법을 익히겠다”며 이곳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비영리 단체다.

우주 산업에서 세계적 수준의 인프라를 자랑하는 스위스의 비결은 기초 과학 연구의 깊이와 공학적 실용화 역량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산학 연계 네트워크, 즉 ‘강의실’에 있었다. 대학 강의실이 곧 우주 산업의 연구개발(R&D) 센터 역할을 하고 있어서다. 유럽우주국(ESA) 창립 멤버이기도 한 스위스는 매년 2억 스위스 프랑(약 3755억원) 이상의 예산을 우주 개발에 투입하고 있으며 약 250여 개의 우주 관련 강소기업 및 연구소가 촘촘한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가령 아리스 소속 학생들이 소형 로켓과 인공위성을 직접 설계하고 제작하려 하면, 수많은 스위스 강소기업이 후원사로 참여해 아이디어 실현에 필요한 고정밀 부품과 최첨단 기술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현장에서 만난 아리스 소속 리차드 루딘은 “이론만 배운 엔지니어를 곧장 산업 현장에 투입할 수는 없다”며 “아리스와 같은 경험이 스위스 공학도들에게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학부 시절부터 값비싼 실전 장비를 직접 다뤄보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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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 내 학생 주도 프로젝트 ‘메이크(MAKE)’ 소속 아르노 로리 학생(왼쪽)과 지오반니 라니에리 학생. 전민구 기자

올해 QS 세계대학 순위 22위를 기록한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학(EPFL)도 로켓·로보틱스 등 분야에서 학생 주도 프로젝트 ‘메이크(MAKE)’를 진행하고 있다. 공학·생명과학·건축 등 서로 다른 전공의 학생들이 모여 로켓과 탐사로봇을 만드는 실습형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학생들이 스스로 연구 목표를 설정하고 예산의 3분의 2를 직접 기업 후원으로 조달하는 학생 주도형 생태계가 구축돼 있다.

최근 성과도 눈부시다. 메이크 소속 로보틱스 연구팀 ‘엑스플로어(Xplore)’는 지난해 9월 유럽 로버 챌린지(ERC) 경연에서 사상 첫 1위를 차지했다. 또한 로켓 연구팀은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로켓 유도항법제어(GNC) 기술에 도전하며 현재는 자체 엔진 시험 설비까지 구축했다. 메이크 소속 아나 슈바베달은 “실습 프로젝트에 몰입하다 보면 때로는 정규 수업에서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은 배움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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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메이크 소속 아나 슈바베달 학생이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실습 프로젝트에 몰입하다 보면 때로는 정규 수업에서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깊은 배움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전민구 기자

스위스가 학문과 현장의 경계를 허문 실무 중심 교육 체계에 힘을 실은 배경에는 ‘인재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절박함이 있다. 좁은 국토와 빈약한 천연자원이라는 한계를 지닌 스위스는 일찌감치 인적 자원 양성에 국가적 역량을 결집해 왔다. 독보적인 우주 산업 인프라를 일궈낸 힘이다.

주목할 점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학교와 사회가 ‘실패할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로잔연방공과대학 메이크 발표 현장에서 만난 학생들은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불이익은 없다. 진짜 문제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연구 도중 로켓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는 일 등이 일어나도, 이 실수는 비난의 대상이 아닌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데이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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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방문한 스위스 항공우주 부품 기업 비욘드 그래비티 스위스 에멘 사업장 전경. 전민구 기자

‘사람에 대한 투자’는 가시적인 결실로 나타나고 있다. 페어링(위성 보호 덮개) 기술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한 비욘드 그래비티(Beyond Gravity)와 같은 기업의 성장이 대표적이다. 니콜라스 토마스 스위스 베른대학교 실험물리학과 교수는 “우리는 5㎛(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초정밀 가공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서도 “진짜 힘은 정밀공학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계를 다루고 혁신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 시스템’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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