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버튼만 누르면 밭갈이 끝...‘K농슬라’ 정작 논밭 못 간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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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앙~.’ 리모컨 작동 버튼을 누르자 주차돼 있던 트랙터가 스스로 시동을 걸고 천천히 밭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러더니 잠시 뒤 밭갈이가 시작됐다. 편도 50m 구간에서 작업하는데 걸린 시간은 30초 남짓. 조종석에 ‘농부 아저씨’는 없었지만, 트랙터는 자로 잰 듯 반듯하게 작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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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전북 완주 LS엠트론 센트럴메가센터의 시험용 밭에서 LS엠트론의 ‘자율작업 트랙터’가 밭작업 시연을 하고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지난달 26일 전북 완주군 LS엠트론 센트럴메가센터의 시험용 밭에서 만난 ‘자율작업 트랙터’는 이렇게 능숙하게 제몫을 하고 있었다. 차도 위에 도로 상황을 스스로 판단해 달리는 ‘테슬라’가 있다면, 농촌에는 논밭 일을 알아서 해내는 ‘농슬라’가 등장한 셈이다.

이 자율작업 트랙터는 직진·회전·후진 주행을 하면서, 1818㎡(약 550평) 규모의 밭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장애물이 나타나자 멈춰선뒤 “전방에 장애물이 있으니 확인 뒤 작업을 재개하라”는 알림을 보냈다. 허현무 LS엠트론 선임연구원은 “자율작업 레벨4 수준으로, 배토·쟁기질·파종 등 각종 농작업을 트랙터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다”며 “작업 중에도 오차가 7㎝ 이내로 베테랑 농부보다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전북 부안에서 13㏊ 규모의 쌀·밀 농사를 짓는 박진만(56)씨는 2년 전부터 레벨3.5 수준의 자율작업 트랙터를 사용 중이다. 사람이 탑승해야 작동 가능하지만, 박씨는 “과거엔 트랙터 무게 때문에 ‘이 악물고’ 작업하다 보면 쉽사리 피곤했는데 레벨3.5만 돼도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면서 농사지을 수 있다”며 웃었다. 그는 “과거에 수작업으로 고랑을 낼 때 아무리 애써도 아홉 개가 한계였다”며 “이제는 자로 맞춘 듯 작업을 하니 한두 고랑이 더 나와 작물도 더 심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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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엠트론의 ‘자율작업 트랙터’는 스마트폰앱으로 시동걸기를 비롯해 트랙터 위치와 연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장정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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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S엠트론의 ‘자율작업 트랙터’ 내부모습. 장정필 객원기자

농촌 고령화와 농업 인구 감소로 자율농기계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자율농기계는 레벨 0~4(원격제어-자동조향-자율주행-자율작업-무인작업)로 나뉘는데, 레벨4부터는 사람 손이 필요없는 무인작업이 가능하다. 국내에선 LS엠트론과 대동 등이 레벨4 수준의 트랙터 개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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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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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은 고부하 농작업 환경에서도 데이터를 스스로 수집하고 학습해 고정밀 무인 자율 농작업이 가능한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 트랙터를 개발 중이다. 사진 대동

문제는 레벨4 기술이 국내 농업 현장에 투입하거나 상용화할 수 없다는 점이다. 아직 자율농기계의 ‘기술·안전 기준’이 한국산업(KS) 표준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기계 주무 부처는 농림축산식품부지만, KS 규격은 산업통상부가 맡고 있다 보니 표준 체계 마련에 진전이 없다. 익명을 원한 농업계 관계자는 “농기계 시장 규모가 자동차처럼 크지 않다 보니 정부나 업계의 적극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율주행차와 마찬가지로 안전책임 문제도 있다.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가 기기를 사용하는 농업인에게 있는지, 제조사에 있는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태호 농업기술진흥원 농기계 검정팀장은 “자율작업 농기계의 기술 수준도 중요하지만, 안전 기준이 완비돼야 상용화가 가능하다”며 “국내에서도 국제 표준인 ‘ISO18497’을 기준으로 관계부처가 검정 기준 도입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자율농기계가 기술·안전 기준을 둘러싸고 제동이 걸린 반면, 경쟁국은 속도를 높이고 있다. 미국 존디어·에그코 등이 일부 작업에서 레벨4 기술을 도입한 상태다.

존디어의 자율작업 트랙터엔 카메라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이 탑재돼 있어 스스로 논밭 갈기부터 씨앗심기, 제초제·비료 살포가 가능하다. 통신이 닿지 않는 오지에서도 원격 농업을 할 수 있도록 위성통신 기술도 접목했다. 24시간 내내 쉼 없이 일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마켓리서치퓨처에 따르면 지난해 402억8000만 달러 규모인 글로벌 자율농기계 시장은 2035년 2787억4000만 달러(약 418조6400억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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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디어는 ‘소비자가전쇼(CES) 2023’에서 이미 자율작업 트렉터를 공개했다. 라스베이거스=고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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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민 기자

상대적으로 제한된 구역에서 작동하는 농기계는 자율주행차보다 위험성이 낮은 만큼 적극적인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목소리다.

김혁주 순천대 융합바이오시스템공학과 교수는 “대부분 인력에 의존하는 과수·밭 농업부터 소형 농기계의 자율작업 도입과 농업용 로봇 투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반도로를 이용하는 트랙터 등은 농기계 등록제로 전환하고, 도로교통법 등 관련 제도를 정비하는 것은 보완 과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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