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고유가, 전쟁보다 길어지나…미 에너지청 “해협 열려도 유가 고공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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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개방을 조건으로 2주간의 휴전에 들어가면서 국제유가 선물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 아래로 내렸다. 고유가 위기가 가신 건 아니다. 해협이 다시 열리더라도 공급망 복구까지 오랜 기간이 걸리는 데다, 전쟁 재개 가능성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8일 오후 4시(한국시간) 기준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5월물은 전날보다 16.2% 급락한 배럴당 94.7달러에 거래됐다. 영국 ICE선물거래소에서 브렌트유 선물 가격도 92.99달러로 하루 새 14.9%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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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해협 지도와 3D 프린팅한 송유관 모형.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시장은 휴전 합의를 공급 정상화의 신호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호르무즈해협이 열린다고 해서 곧바로 원유 공급이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원유 거래 시장에선 이런 불안감을 반영한 ‘백워데이션(Backwardation)’도 나타나고 있다. 당장 인도받을 수 있는 원유 현물 가격이 선물 가격을 크게 웃도는 이례적 현상을 뜻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7일(현지시간) 브렌트유 현물 가격은 배럴당 144.42달러로 1987년 집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같은 날 브렌트유 선물 가격이 109달러 수준에서 거래된 것을 고려하면 30달러 이상의 괴리가 생겼다. 원유 선물은 통상 보관·운송 비용이 반영돼 현물보다 비싼 것이 정상이지만, 당장 공급량이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보니 역전 현상이 생겨났다.

전문기관 분석도 이런 시장 반응을 뒷받침한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은 7일(현지시간) 단기 에너지 전망 보고서를 통해 “호르무즈해협이 열리더라도 공급망이 완전히 복구되고 중동 생산이 정상화되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 있다”며 “연료 가격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EIA는 국제유가 벤치마크(기준이 되는 지표)인 브렌트유 현물 가격을 올해 배럴당 평균 96달러로 전망했는데, 기존 전망치(79달러)보다 약 17달러 높다. 전쟁이 끝나면 즉각적인 가격 하락을 경험할 것이라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담과는 다른 전망이다. EIA는 보고서에서 “우리가 해협이 닫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시 열리는 것도 본 적이 없다”며 “정확히 어떤 모습일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평가했다.

싱가포르의 금융투자사 필립 노바의 프리얀카 사치데바도 보고서에서 “휴전으로 해협이 다시 개방될 수는 있지만, 에너지 기반 시설에 입은 피해를 되돌릴 수는 없다”며 “이번 분쟁의 진정한 비용은 앞으로 몇 달 동안 주유소 가격과 전 세계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통해 지불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황병진 NH투자증권 FICC리서치부장은 “호르무즈해협이 재개방되면 국제유가가 WTI 기준 배럴당 80~90달러에서 횡보한 후, 연내 점진적으로 70~80달러 수준으로 하향 안정될 것”이라며 “주요 소비국들의 재고 비축 수요도 하향 안정화 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변수”라고 짚었다.

모건스탠리는 보고서에서 “구매자들이 현재 공급 가능한 안정적이고 정제 가능한 대서양 연안 원유에 대해 이례적인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있다”며 “아시아에서 대체 물량에 대한 입찰 경쟁이 시작되면서 브렌트유 시장으로 부담이 확산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마크 크랜필드 블룸버그 전략가는 “중동 재건이 가능한 설득력 있는 출구 전략이 제시되기까지 갈 길이 멀고, 설령 전략이 제시된다 해도 향후 몇 달간 유가에는 전쟁 프리미엄이 반영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기구들도 잇따라 경고음을 높이며 공동 대응에 나섰다. 이날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오는 13일 IEA·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 수장이 한자리에 모여 에너지 위기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밝혔다. 비롤 사무총장은 프랑스 르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세계는 이처럼 심각한 에너지 공급 차질을 겪어본 적이 없다”며 “1973년(1차 오일쇼크)·1979년(2차 오일쇼크)·2022년(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위기를 합친 것보다 더 심각하다”고 평가했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도 블룸버그·로이터와 잇따라 인터뷰에 나서며 “전쟁이 당장 멈추더라도 부정적 영향은 장기간 지속할 것”이라며, 세계 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조정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는 “전쟁으로 전 세계 석유 공급이 13% 감소했다”며 “이제 모든 길은 물가 상승과 성장 둔화로 이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협상에 참여했던 한 지역 당국자는 AP통신에 “2주간 휴전 계획에 이란과 오만이 호르무즈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에 통행료를 부과하도록 허용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CNN 등에 따르면 선박당 최대 200만 달러를 청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통행료를 내게 된다면 당장 중동산 원유 의존도가 높은 한국 기업은 가격 압박을 받게 된다. 이날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국회 예결위에서 “비축유를 제외하고 5월까지는 사용량 부분을 확보하고 있다”며 “(통행료 지급을) 현재로써는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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