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굳이 낯선이와 감자튀김만 먹고 헤어진다…선 있는 요즘 모임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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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는다. 짧게 인사를 나눈 뒤, 각자 노트북을 켠다. 누군가는 밀린 이메일을 정리하고, 누군가는 과제를 이어간다. 또 다른 이는 가계부를 정리하거나 개인 프로젝트 작업을 펼쳐놓는다. 대화는 길지 않고, 이내 모두 각자의 화면으로 시선을 모은다. 같이 있지만 따로의 시간이다.

이른바 ‘어드민 나이트(Admin Night·행정 업무의 밤)’, 우리말로 ‘각할모(각자 할 일 하는 모임)’다. 이는 단순히 밤늦게까지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갓생’의 연장선이 아니다. 타인의 존재를 동력 삼아 지루한 일상 업무(Life Admin)를 해치우되, 서로에게 깊이 개입하지 않는 ‘선 넘지 않는 관계’를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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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에 모여 각자 노트북을 펼쳐놓고 작업하는 모습. 해외에서는 ‘어드민 나이트’, 국내에서는 ‘각할모(각자 할 일 하는 모임)’로 불리며 확산되고 있는 만남의 방식이다. 사진 Unsplash

행정 업무의 밤…모여서 각자 할 일 한다

이 변화의 핵심은 관계의 목적이 ‘친목’에서 ‘각자의 삶을 함께 정돈하는 것’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를 “지루한 관료적 일상의 노고를 파티로 바꾸는 법”이라 표현했고, CNN은 친구를 넘어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동기부여는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 모습을, 아이들이 각자 장난감을 가지고 나란히 노는 ‘평행 놀이(Parallel Play)’에 비유하며 ‘성인용 평행 놀이’라고 설명했다.

친구나 지인끼리의 일상적인 만남에서 출발한 어드민 나이트는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참가자를 모집해,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 시간을 보내는 방식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이전에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만났다’면, 이제는 ‘할 일을 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셈이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는 ‘생산성’이라는 명분이 들어선다. 사교와 생산성이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활동으로 결합한 형태다.

말 없는 공존…‘자극 없는 연결’을 소비하는 세대

실제로 틱톡(TikTok),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는 ‘#adminnight’, ‘#bodydoubling’ 해시태그를 단 영상들이 꾸준히 공유되고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노트북을 켜고 조용히 업무나 공부에 몰입하는 장면에 Lofi 음악(잔잔한 비트의 배경 음악)을 덧입히기도 한다. 화려한 자극 대신 ‘자극 없는 연결’이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소비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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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톡 #adminnight 해시태그 영상들. 노트북과 커피를 앞에 두고 각자의 일에 몰입하는 장면이 주를 이루며, 조용한 공존 자체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보여준다. 사진 틱톡 캡처

대학생 목혜민(23)씨는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락인 효과’가 있는 것 같다”며 “특히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면 딴짓을 하기 어려워지고,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는 타인의 존재가 작업 효율을 높이는 ‘사회적 촉진(Social Facilitation)’ 효과와도 맞닿아 있다. 외신에서는 이를 ‘바디 더블링(Body Doubling)’이라 부르며,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동기부여를 얻는다고 설명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산하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나 오픈 채팅방을 통해 참가자를 모집해, 서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일을 하는 방식이다. 공통의 목적이 분명한 만큼, 불필요한 대화 없이도 자연스럽게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을 선호한다. 물론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부담스러운 이들은 친구들끼리 비슷한 방식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카페에 모여 각자 공부를 하거나, 밀린 일을 정리하다가 식사를 함께하는 식이다.

대학생 이채민(25)씨는 “요즘은 술자리처럼 친목 중심의 모임보다, 할 일을 하면서도 부담 없이 함께 있을 수 있는 ‘건강한 모임’이라는 점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며 “혼자 있는 건 편하지만 길어지면 외롭고, 그렇다고 깊은 관계는 부담스러울 때가 많다. 같이 있지만 각자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오히려 더 편안하다”고 말했다.

사교가 더 이상 감정을 주고받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고, 각자의 삶을 유지하면서도 최소한의 연결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감튀’부터 ‘경도’까지…부담없는 접점 선호

각자의 시간을 존중하는 관계는 점점 더 다양한 형태로 확장하고 있다. 감자튀김을 함께 먹고 짧게 헤어지는 ‘감튀 모임’이나, 공원 등에서 모여 역할 놀이를 하는 ‘경찰과 도둑(경도)’ 모임처럼 관계보다 경험 자체를 중심에 둔 만남이다.

이런 모임은 공통적으로 관계의 깊이보다 ‘부담 없는 접점’을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짧게 만나고 가볍게 흩어지는 구조 속에서, 관계는 유지하되 감정적인 소모는 최소화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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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서구 서울식물원 잔디밭에서 열린 '경찰과 도둑' 놀이 참여를 위해 모인 사람들. 도둑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등에 '도둑' 표시 종이를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오프라인 모임의 변화는 브랜드 전략에도 반영된다. 맥도날드는 지역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과 협업해 ‘감튀 모임’을 열며 제품 소비를 ‘모임의 계기’로 확장했고, 하인즈 역시 당근과 함께 오프라인 커뮤니티 이벤트를 선보였다. 스타벅스처럼 각자의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브랜드 역시 같은 맥락이다.

해외에서는 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나이키나 애플처럼 브랜드가 직접 러닝 클럽이나 워크숍, 커뮤니티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함께 있지만 부담 없는 연결’을 경험으로 제공하는 식이다.

단순한 제품 소비를 넘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이유’를 만드는 것. 관계의 양상이 달라지면서, 브랜드 역시 사람들을 연결하는 방식을 다시 설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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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맥도날드는 지역 생활 커뮤니티 플랫폼 ‘당근’과 협업해 지난달 6일 ‘공식 감튀 모임’을 열었다. 사진 한국맥도날드

선 넘지 않는다…관계 유지도 ‘비용’

‘선 넘지 않는 관계’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현상을 전문가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이러한 흐름의 핵심 기제로 ‘사회적 촉진(Social Facilitation)’을 꼽는다.

곽 교수는 “도서관이나 헬스장에서 혼자 있을 때보다 수행 능력이 올라가는 것처럼, 타인의 존재 자체가 작업 효율을 높이는 자극이 된다”며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능률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요즘 젊은 세대는 관계를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감정적 에너지를 하나의 ‘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며 “불필요한 소모는 줄이면서도, 혼자 있을 때 느끼는 나태함이나 고립감은 피하려는 태도가 ‘느슨한 연결’이라는 새로운 관계 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곽 교수는 “효율적인 관계도 중요하지만, 정서적으로 기댈 수 있는 깊은 유대 역시 삶에 필요한 자원”이라며 “느슨한 관계와 깊은 유대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b.이슈

비크닉이 흘러가는 유행 속에서 의미 있는 이슈를 건져 올립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매력적인 공간을 탐색하고, 시대와 호흡해 성장하는 브랜드와 기업을 조명합니다. 비즈니스적 관점은 물론, 나아가 삶의 운용에 있어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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