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아이랑GO]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 의사의 삶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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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심심해~”를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다닌다고요? 일기쓰기 숙제하는데 ‘마트에 다녀왔다’만 쓴다고요? 무한고민하는 대한민국 부모님들을 위해 ‘소년중앙’이 준비했습니다. 이번 주말 아이랑 뭘할까, 고민은 ‘아이랑GO’에 맡겨주세요. 이번 주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합니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가다
을사늑약 4년 후인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는 일제에 맞선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드러내고, 동양평화를 짓밟은 침략자를 응징한 대표적인 반제국주의 항거다. 안중근 의사는 왜 하얼빈 의거를 계획한 걸까. 또 하얼빈 의거 이전에 안중근 의사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학생기자·황지인(서울 봉은초 6) 학생모델·정하은(서울 노원중 1·왼쪽부터) 학생기자(왼쪽부터)가 안중근 의사의 삶을 살폈다.
서울시 중구 소월로에는 민족정기를 탄압하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1970년 건립·개관한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있다. 안중근 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 사상과 정신을 널리 보급하는 곳이다. 우리는 하얼빈 의거 전후 안중근 의사 행적은 교과서나 영화·뮤지컬·소설 등을 통해 잘 알지만, 독립운동가로 활약하기 전 안중근 의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상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이주화 학예부장과 함께 우리가 몰랐던 안중근 의사의 여러 모습을 알아봤다.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 진사와 모친 조마리아 여사 사이 장남으로 출생했다. 배와 가슴에 점이 7개가 있어 아명을 응칠(應七)이라 불렀으며, 어려서부터 한학(漢學)과 말타기·사격술을 익혔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 국내외 정세에 대해 살폈다.
“안중근 의사 출생 전후는 한국이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군함 운요호의 강화도 침범 사건으로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1876년), 신식 군인 우대 정책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1882년), 조선을 근대국가로 만들고자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1884년), 청과 일본이 동학농민군 봉기를 빌미로 벌인 청일전쟁(1894년), 일제가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년)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웠죠.” 당시 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려 했으나, 역량 부족과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1세로 순국할 때까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에 흔히 그의 이름 앞에 도마라는 세례명이 함께한다. 안중근 의사는 1897년 부친을 비롯한 일가친척들과 함께 천주교에 입교해 프랑스 출신 빌렘(Wilhelm·洪錫九)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빌렘 신부와 함께 황해도 여러 지역에서 선교활동과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펼쳤다. 빌렘 신부는 교리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물과 사상, 국제정세 등을 알려주며 안중근 의사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줬다. 전시실에는 안중근 의사가 빌렘 신부에게 1908년 보낸 엽서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안중근 의사를 하얼빈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사실 안중근 의사는 국내에서 구국 운동을 벌이던 교육자로서의 삶을 먼저 시작했다. 일제는 한반도의 지배권을 두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6년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준비기구인 통감부가 설치됐고, 나라의 모든 실권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주화 학예부장이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독립투사의 면모 외에도 안중근 의사의 다양한 모습을 설명했다.
대한제국이 허울만 남은 상황에서 안중근 의사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르 각(Le Gac·郭元良) 신부를 만났다. “국가의 독립과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의 진흥이 가장 중요하다”는 르 각 신부의 조언에 안중근 의사는 국내로 돌아와 1906년 평안남도 진남포에 중등학교인 삼흥학교를 세우고, 초등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해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려 했다. 국제 감각의 중요성을 깨달은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 학생들이 외국어를 배우도록 했다.
하지만 일제는 더욱 노골적으로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했다. 일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특사를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같은 해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도 해산시켰다. 이를 지켜보던 안중근 의사는 국내 구국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더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향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안중근 의사의 사진은 왼손 약지의 일부분이 잘려나간 모습이다. “왼손 약지 절단은 의병 재기를 다짐하기 위한 애국결사의 결과였어요. 안중근 의사는 1908년 6월 연해주에서 100여 명의 의군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승전을 거듭했어요. 일제강점기에 항일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외국에서 군대를 양성해 국내로 진격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작전을 국내진공작전이라 해요. 이때 안중근 의사는 포로로 잡은 일본군을 당시 국제법인 ‘만국공법’에 따라 석방했는데, 이 일로 의병부대의 위치가 노출됐어요. 결국 안중근 의사가 이끈 의병부대는 일본군 본대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패했죠. 국내진공작전이 수포로 돌아간 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초 연해주에서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단지회를 조직했어요. 이들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유지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며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대한독립’ 혈서를 썼죠.”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왼손 약지 마디를 잘라 혈서를 쓰며 조국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는 일본의 초대 총리대신과 한국의 국정 전반을 사실상 장악했던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의 재무대신 코코프초프와 동북아 정책을 협의하고자 북만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을 처단할 절호의 기회로 본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조도선과 함께 의거 계획을 세웠다.
거사 당일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 일행은 확실한 성사를 위해 두 개의 조로 나눠 대기했다. 채가구역에서는 우덕순·조도선이, 하얼빈역에서는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결행하기로 했다. 채가구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탄 특별열차를 기다리던 우덕순과 조도선은 실패했지만, 하얼빈역에서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의거에 성공했다.
의거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 의사는 그날 저녁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으로 신병이 인도됐고, 11월 3일 뤼순감옥으로 압송돼 이듬해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 144일간 수감됐다. 일제는 심문과 재판을 진행했지만, 일본 외무성은 “안중근에게 극형을 내리라”는 사전 지령을 내리는 등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안 의사를 처형할 방침이었다.
하얼빈 의거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외 각지에서 안중근 의사 구명운동과 재판에 대비한 모금 운동도 벌어졌다. 그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일제는 안중근 의사의 한국인이나 외국인 변호사의 선임을 막고 일본인 관선 변호사만 허용하는 등 불법 재판을 강행했다.

안중근 의사 공판 방청권.
1910년 2월 7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 법정에서 첫 공판이 열렸다. 안중근 의사는 재판정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죄상 15개 조”를 당당히 밝혔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고종 강제 폐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 외에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동양 평화를 파괴한 죄 등이 포함됐다.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평화의 파괴자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일제는 하얼빈 의거를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에 대한 통치 정책을 오해하여 저지른 개인적인 살인 행위로 몰아가려 했다. 이에 맞서 안중근 의사는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한국독립투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이토를 살해한 후 나는 국제재판에 나가서 이토의 죄악을 일일이 진술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생각이었다”라는 대의를 밝히며 대한제국 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하다 암살을 결행한 것이라 주장하며 자신을 만국공법에 입각한 전쟁 포로로 대우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인들로 구성된 재판부는 일본 외무성의 사전 지령에 따라 1910년 2월 14일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안중근 의사는 “일본에는 사형 이상의 형벌은 없는가?”라고 반문하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역사』.
사상가이자 문장가이기도 했던 안중근 의사는 뤼순감옥에서 자서전인 『안응칠역사』, 한국의 독립과 인류의 평화를 위한 『동양평화론』(미완성)을 비롯한 여러 유묵을 남겼다. 1879~1910년의 30년 7개월간 자신의 생애와 활동을 기술한 『안응칠역사』는 사본만 전하지만, 안중근 의사의 나라 사랑 정신과 인간으로서의 담대함과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안응칠역사』 사본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60년 후 세상에 알려졌어요. 1969년 일본 도쿄의 간다 고서점에서 도쿄 국제한국연구원 최서면 원장이, 1978년에는 일본 나가사키에서 고미술상을 경영하던 와타나베 쇼시로가 각각의 사본을 발견했죠. 이듬해인 1979년에는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의 등사(복사)합본이 세상에 드러났는데 여러분이 앞서 살펴본 안중근 의사의 어린 시절과 교육자로서의 삶 등은 『안응칠역사』를 기반으로 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의 조부모님 세대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전의 삶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수도 있습니다.”
『동양평화론』은 안중근 의사가 열흘 동안 작성한 미완성의 논문이다. 총 다섯 개의 장 중에서 제3~5장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 채 순국했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동양평화론』의 일부와 당시 뤼순 고등법원장과의 면담에서 밝힌 소견 등을 통해 안중근 의사가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동양평화론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뤼순을 중립지대로 정해 한·중·일 삼국의 평화기구를 두고, 삼국 공동 화폐를 사용하고 은행을 설치하며, 삼국 청년들로 공동 군대를 만들고 상대국 언어를 습득시켜 우의를 다지게 하자는 것이다.
소중 학생기자단이 이주화 학예부장과 함께 안중근 의사의 생애 및 업적과 관련된 여러 유물을 둘러봤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전 세계 제국주의 세력에 경종을 울린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동포·어머니·아내와 빌렘 신부 등에게 유서를 남겼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일제에 항소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1910년 3월 26일 어머니가 보내준 흰색 명주 한복을 입은 안중근 의사는 “내가 한 이토 히로부미 사살은 동양 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동양 평화가 이루어지길 바랄 뿐이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간수에 이끌려 교수대에 올라 순국했다. 그렇다면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어디에 있을까. 이 학예부장이 보여준 전보에는 ‘안중근 사형 집행 끝’이라는 짧은 문장만 적혀있었다.
“보통 사형을 집행하고 나면 이 사람을 어디에 묻었는지, 누구에게 시신을 인도했는지 등을 전보에 적습니다. 그런데 이 전보에는 안중근 의사가 묻힌 장소가 표기돼 있지 않아요. 안중근 의사의 묘소가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두려워 한 일제가 정근·공근 두 동생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인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안중근 의사는 생전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옮겨 묻어달라’고 요청했지만, 안 의사의 유해는 비밀리에 뤼순감옥 공동묘지에 묻혔고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를 몰라 고국으로 송환되지 못하고 있어요.”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에 안중근 의사의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기 위해 1970년 건립됐다.
하얼빈 의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를 겪어야 했다. 안중근 의사의 투지와 구국열은 이후 강우규·김상옥·나석주·이봉창·윤봉길 등 후대의 여러 독립운동가에게 계승됐다. 백범 김구는 안중근 의사를 ‘한국 독립운동의 지주’로 받들기도 했다.
그의 가문 역시 안중근 의사의 신념을 이어갔다.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임시정부 경제후원회와 상하이 재류동포 정부경제후원회에서 활동하며, 가문 인사 및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또 안중근 의사의 동생 공근·정근 형제는 임시정부·한인애국단 등에서 활약했으며, 사촌 안명근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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