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멋 부리지 말라” 추사의 원포인트 레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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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간송미술관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에 전시 중인 ‘팔인수묵산수도’와 진열장 속 『예림갑을록』. [사진 대구간송미술관]

1848년 약 9년에 걸친 제주 유배를 마친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려온 문인·화가들이 곧바로 그를 찾았다. 서예가와 화가 등 14명이 작품을 내놓고 당대 명사이자 서화가였던 추사의 품평을 듣는 모임이 여러 차례 열렸다. 이때 남긴 ‘원포인트 레슨’이 『예림갑을록』(1849)이다. 여기에는 8명의 화가가 그린 24점의 그림 평이 수록돼 있다.

현재 실물이 전하는 것은 ‘팔인수묵산수도’뿐이다. 각각 세로 72.5㎝, 가로 34㎝ 비단에 먹과 담채로 그린 산수화 8점으로, 이른바 ‘추사의 여덟 제자’의 개성을 한눈에 보여준다. 허련, 전기, 유재소, 김수철, 유숙, 조중묵, 이한철, 박인석이 그들이다.

올해 탄신 240주년을 맞은 추사의 예술과 그 영향을 이은 ‘추사파’ 화가들을 조명하는 전시가 대구간송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7월 5일까지 이어지는 기획전 ‘추사의 그림 수업’이다. 간송 소장품을 중심으로 ‘팔인수묵산수도’(리움미술관 소장) 등 여러 기관이 참여해 47건 67점을 모았다. 특히 추사가 제주 유배 중(1844년)에 그린 걸작 ‘세한도’(국보)가 서울과 제주를 벗어나 처음 공개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컬렉션에서 질적·양적으로 손꼽히는 두 축이 겸재 정선(1676~1759)과 추사 김정희다. 19세기 북학시대를 대표하는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였던 추사는 시·서·화를 하나로 본 문인화의 대가이기도 했다. 다만 추사체 중심의 서예 작품에 비해 남긴 그림은 많지 않다. 전시를 기획한 이랑 학예연구사는 “화첩을 포함해 10건 남짓 전하는데, 이번에 선보이는 5건 14점(교체 포함)이 사실상 대표 그림들”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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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글씨 ‘계산무진(谿山無盡)’. 강혜란 기자

전시의 첫머리를 여는 작품은 세로 62.5㎝, 가로 165.5㎝ 한지에 쓴 ‘계산무진(谿山無盡)’이다. 마치 춤추듯 휘갈긴 필획 속에서 산을 본뜬 듯한 ‘산(山)’ 자와 계곡 물 흐르듯 굽이치는 ‘계(溪)’ 자가 살아 움직인다. ‘계산은 끝이 없구나’라는 기세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랑 학예연구사는 “글자 하나하나가 아우라를 지닌 서화일체(書畵一體)의 본보기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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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갈필로 소슬한 정취를 표현한 그림 ‘고사소요’. [사진 대구간송미술관]

‘세한도’는 그런 고졸한 미감의 절정에 놓인 작품이다. 이 밖에도 ‘고사소요’ ‘소림모옥’ 등 대부분의 그림이 마른 붓질로 구현한 소슬한 정취를 담고 있다. 18세기 이후 풍속화와 실경산수화 등 사실주의 화풍이 득세한 흐름 속에서, 추사는 오히려 일종의 ‘삐딱선’을 탔다. “현실과 사실 위주의 형상적 화법이 그림을 속되게 만든다고 보고, 탈형상적인 서법(書法)으로 그릴 것을 강조”(강관식 전 한성대 교수)한 미학은 제자들의 작품을 품평할 때도 드러난다. 예컨대 유재소의 ‘추수계정’에 대해 “갈필을 쓴 것은 나쁘지 않으나 멋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평했다. 갈필(渴筆)은 먹을 적게 묻힌 마른 붓으로 그리는 수묵화 기법이다.

주목할 점은 여덟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곡진히 받들면서도 각자의 화풍을 발전시켰다는 사실이다. 특히 도화서 화원 출신인 유숙, 조중묵, 이한철, 박인석은 궁중화와 인물화의 엄격한 기법 위에 추사의 화법을 접목해 절제된 수묵채색화를 선보였다. 전시는 이들 여덟 명의 작품을 아우르는 3부를 거쳐 4부 ‘추사의 향기 매화에 깃들다’에서 만개한다. 추사 화파의 핵심 인물인 조희룡의 ‘홍백매도’(세로 123㎝, 가로 380㎝) 등 대작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화단의 변화를 입증한다.

전시품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한도’(5월 10일까지)는 ‘난맹첩’(5월 12일~7월 5일), ‘불이선란도’(6월 2일~7월 5일)와 교체 전시된다. 성인 관람료 1만1000원, 학생·청소년 5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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