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르네상스 시대 천재 철학자...언어의 마법적 힘에 대한 그의 탐구[BOOK]

본문

bte55088f235053a5562493bd04416609b.jpg

책표지

천사들의 문법
에드워드 윌슨-리 지음
김수진 옮김
까치

 교황 관저인 바티칸 사도 궁전 벽에 그려진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등 고대 그리스의 뛰어난 철학자들이 총출동한 이 그림 왼편에 유독 화면 밖 관찰자를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의 인물이 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애매한 수수께끼 인물로 고대 그리스의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라는 설이 있다. 저자는 그를 15세기 르네상스기 천재 철학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라고 추측한다.

btc80b5b67620e81b0f93faaaf003b4f50.jpg

'아테네 학당'의 일부. 가운데 금발에 흰 옷 입고 정면 바라보는 사람이 피코로 추정되는 인물. [사진 까치]

전작 『물의 시대』에서 추리 소설 형식을 빌려 대항해 포르투갈을 생생하게 되살렸던 저자가 이번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피코 델라 미란돌라를 불러왔다. 우리에겐 낯선 이름이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지, 지적 보편주의를 믿은, 누구보다 대담하고 천재적인 철학자였다.

 피코는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고대 셈어 등 각종 언어에 능했고 그리스 철학, 기독교, 유대교뿐 아니라 아랍 중세 철학까지 섭렵하며 ‘보편 철학’을 추구했다. 읽은 책을 모조리 외워버리는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 탁월한 웅변가, 미남자였다. 불과 스물네 살의 나이에 종교, 철학, 자연 철학, 마법에 대한 900개의 논제를 정리한 책 『논제 900』을 발표했다. 당시 책에 대한 공개 대토론회를 제안하며 그가 쓴 연설문은 흔히 ‘르네상스 선언문’이라 불린다. 그는 곧 이단으로 몰렸고 책은 불태워졌다. 로마 교황청에 의해 체포·투옥을 반복하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나이가 서른한 살. 『논제 900』은 교황청이 전면 금지한 최초의 인쇄 서적이다.

사실 저자가 피코의 사상에서 가장 주목한 부분은  ‘언어의 숭고한 힘’이라는 그의 사유였다. 이방의 언어까지 통달한 그는 모든 구전 전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람의 넋을 홀리고 의지를 조종할 수 있는 언어의 내재적 힘에 주목했다. 언어·노래뿐 아니라 심지어 새들의 지저귐, 소리와 운율에서도 느껴지는 황홀경과 가슴 벅찬 숭고한 감정을 말이다.

bt5a7d9488ff6ddead493097f967123198.jpg

피렌체 산탐브로조 성당의 벽화 '성혈의 기적'의 부분. 가운에 인물이 피코. [사진 까치]

우리는 왜 아름다운 시나 음악을 들으면 소름이 돋는가. 왜 주문을 외우면 황홀경에 빠지는가. 언어의 마법적 힘은 자장가로 아이를 재울 때, 독재자가 선동의 언어로 청중을 포획할 때도 발휘된다. 또 ‘넋이 나가다’ ‘도취되다’ ‘마음을 빼앗기다’ ‘황홀해지다’ ‘매료되다’ ‘무아지경이다’ 같은 단어들도 이성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언어의 숭고한 힘을 방증한다.

 피코는 이런 언어의 황홀경을, 우리가 천사의 상태에 들어선 것이라 표현했다. “모든 존재는 근본적으로 하나”이기에 천사의 상태란 “구별되지 않은 상태”, 초월적 존재의 반열에 오른 상태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파생되어 나온 구별되지 않은 형태의 존재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존재의 중심이자 시작점에 있는 하나됨으로 합져지고 싶다는 뿌리 깊은 욕구가 있다.” “목소리와 말에는 마법의 효과가 있다.(중략)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목소리보다 아무 의미도 없는 목소리에 마법의 힘이 더 있다.” 이런 피코의 주장은 근대 합리주의에 이르러 소거된 신비주의적 측면이 있지만, 그마저도 충분히 흥미롭다.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최후의 시간을 보낸 피코는 생각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 혼란한 글들을 써내려갔다. 저자의 표현대로 피코의 마지막 글들이 “일종의 숭고한 뜻모를 말로 변한 것”조차 “그와 퍽 어울리는 일”이었다. 책은 방대한 자료에 기초해 피코의 사상과 생애를 재구성하고, 그와 지적으로 교류한 인물들도 함께 조명했다. 한 인물의 전기이자 이탈리아 르네상스 사상계의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텔레그래프 선정 2025년 ‘올해의 책.’ 지적인 독서 리스트에 추가할만하다. 저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7,099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