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말라야 독립 속 학자의 길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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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
Great Place to Work / 제 6부 일하기 좋은 곳
Closer to Home / 집 가까운 곳으로
1957년 8월 31일, 말라야연방이 독립을 이룬 날 우리는 항해 중이었다. 나는 이제 주권국 국민이었다. 배가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는 툰쿠가 이끄는 UMNO(통일말레이 민족기구)-MCA(말라야 중국인협회)-MIC(말라야 인도의회)의 연합당이 영국기가 내려오고 새 국기가 올라가는 순간을 기념한 뒤였다. 왠지 형언할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느껴졌다.
툰쿠: 말레이시아 초대 수상 툰쿠 압둘 라만(xxxx-xxxx, 수상 재임 xxxx-xxxx)의 널리 쓰인 호칭. (“툰쿠”는 원래 술탄국 왕족의 칭호다.) 말레이시아를 구성하는 여러 종족의 정부 차원 연합을 정치구조의 기반으로 삼다가 1970년경 종족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실각했다.
싱가포르의 정치는 다른 분위기였다. 데이비드 마셜이 이끄는 노동전선은 독립을 추구했으나 안보 문제에 영국, 말라야, 싱가포르 중 어느 쪽이 최종 결정권을 갖느냐 하는 문제에 막히면서 마셜이 사퇴했다. 마셜의 후임자 림유혹(林有福)은 좌익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해 재판 없이 구속하라는 식민당국의 명령을 받아들일 태세라고 들었다. 대상자 중에 제임스 푸투치어리, 시드니 우드헐 등 인민행동당(PAP)에 합류한 사회주의클럽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중에도 대학은 별로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역사학과 교수 중 그간 ‘파킨슨 법칙’으로 명성을 얻은 파킨슨 교수는 경영학의 현자와 공적 지식인으로서 전세계적 역할을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런던으로 떠난 직후 부임한 켄 트레고닝이 있었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 에밀리 사드카의 후임으로 유니스 티오가 들어와 있었다. 내가 돌아오기 직전에 들어온 교수가 둘 있었다. 레너드 영은 영국의 중국 외교에 관한 큰 연구를 해낸 사람이었고, 앨러스테어 램은 대단히 넓은 범위의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모두 19세기 후반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혼자 고대(중세?)사를 전공하는 나는 개밥에 도토리 같은 신세였다.
파킨슨 법칙: 역사학자 노스코트 파킨슨(xxxx-xxxx)이 논문(1955)과 책(1957)으로 발표한 우화적 이론. (1) “일거리는 주어진 시간을 채울 만큼 늘어나게 되어 있다.” (2) “공공기관의 인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업무량에 관계없이 늘어나게 되어 있다.” 1950년에서 1960년까지 말라야대학 역사학 교수로 말라야 역사의 연구를 이끌었으나 “파킨슨 법칙”이 대 히트를 친 후 대학을 떠나 저술가로 활동했다.
파킨슨 교수는 내게 소위 “초기 근대”라 불리는 16-18세기 역사를 “극동”에 초점을 두고 가르치도록 청했다. 내가 막 작업을 끝낸 10세기 중국보다 까마득한 후세인데, 아편전쟁 이전의 중국사 편년은 답이 없는 상태였다. 진 시황 이후 2천년간 중화제국의 모습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였으니 10세기 당-송 교체기의 역사가 16세기 명나라 중기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 생각은 달랐고, 학생들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서 있으려면 공부가 많이 필요할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행히 파킨슨 교수가 준비할 시간을 주어서 두 달 동안 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3세기 동안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진출, 그 뒤를 이은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에 관한 책을 손 닿는 대로 모두 검토했다.
오래된 과거에 관심을 가진 것이 나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앨러스테어 램의 호기심에는 한계가 없었다. 말레이반도에 대한 힌두교와 불교의 영향에 깊은 관심을 가진 그는 학생을 모아 케다 지역 고고학 발굴단을 꾸렸다. 나도 참가를 자원한 것은 말라카해협을 지나 벵골만으로 진출했던 남해 교역의 연구로 돌아갈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돌아온 지 몇 달 안돼 케다의 부장 구역 발굴에 따라가게 되었다.
마거릿은 세인트앤드류즈 학교에서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고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주기를 그에게 바라는 아주 총명한 학생들과의 만남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영어 교사로 돌아와 달라는 세인트앤드류즈 학교의 편지를 영국에 있을 때 받았다. 6학년 반을 맡기겠다고 했다. 우리 둘 다 직업이 필요했고 싱가포르의 새살림을 위해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에 초청을 받아들였다.
전에 가르친 학생 중에 6학년 반에 올라와 있어서 다시 만나게 된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에서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곳에 2년도 더 있지 못할 것은 생각지 못했다.
처음 와서 살 물건도 많았으나 겅우 아버님께 빌린 돈을 3개월 내에 갚고, 1963년에 페탈링 자야 집을 근저당으로 지을 때까지 빚 없이 살았다. 우리는 대체로 수입이 괜찮았고 꾸준히 늘어났다. 아직 젊고 돈 무서운 줄 모를 때여서 별생각 없이 돈을 쓰고 지냈다.”
말라야가 독립하고 보니 나라 이름을 가진 대학이 싱가포르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되었다. 내 귀국 전에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말라야대학 캠퍼스를 쿠알라룸푸르(KL)에 만들 것이 확실해지고, 그곳 교수진을 따로 확보하기 전에 1958년 신입생부터 그곳에서 공부를 시작하도록 협의가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 자원한 앨러스테어 램을 도와주라는 요청을 돌아온 몇 달 후에 받았다. 격주로 이틀씩 비행기로 KL에 가서 빌린 전문대학 건물에서 강의하고 오는 일이었다. 1958년 말 결단의 시간을 맞았다. 국립대학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KL 캠퍼스로 건너간다는 결단이었다.
우리가 싱가포르로 돌아온 몇 달 후 인민행동당이 시의회를 장악하고 옹엥관(王永元)이 시장이 되었다. 옹 시장은 시 정부 운영에 과감한 변화를 도입했고, 1959년으로 예정된 선거에서 극적인 결과가 기대되었다. 나는 학생 집회에 각 당 지도자들이 초청받아 정견을 발표하는 자리 외에는 정치를 살펴보지 않고 있었다. 두 도시를 오락가락하며 강의하고 KL로 이사할 준비를 하느라고 바빴다. 그에 더해 전에 쓴 쑨원과 캉여우웨이에 관한 논문이 말라야국민당의 전사(前史)라 할 수 있는 것이어서 공개강연 초청이 있었다.
내 장래 연구 관심의 지평을 넓혀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은 남양 화교에 관한 8회 강연을 해 달라는 라디오 사라와크의 초청이었다. 그 주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고 왜 초청받게 되었는지 몰랐지만 응낙했다. 수백 년에 걸쳐 이 지역에 형성되어 온 중국인사회에 관한 공부를 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인 상인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자라나며 수많은 중국인 체류자가 현지에 자리 잡고 규모 있는 교민집단을 이룬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나 역시 스스로 모르는 사이에 그 집단의 일원이 되어 있는 셈이었다.
남양 화교의 송금을 위해, 그리고 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에서 베이징과 타이완이 화교의 지지를 놓고 벌이는 경쟁에 새로 독립한 동남아시아 국가 정부들의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특히 인도네시아 화교의 분열이 뚜렷해서 수카르노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인도네시아공산당(PKI),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우익 민족주의 진영 사이의 정쟁에 끼어 있었다. 그런 분열은 말라야에서도 나타났지만 영국 당국이 친-베이징 세력과 친-타이완 세력 양쪽을 모두 억제하고 있었다. 1950년 마닐라 방문 때 필리핀 화교에 관해 배운 것이 생각났고, 태국, 인도차이나와 버마의 화교에 관한 연구도 구할 수 있는 대로 읽어보았다. 중국과의 관계와 이 지역 이주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데 나는 특별히 중점을 두었다.
내 관심에는 또 하나 이유가 있었다. 런던을 떠나기 직전 “백화제방 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이란 마오쩌둥의 놀라운 슬로건에 관한 기사를 읽었다. 그러나 그 “자유주의”의 순간은 길지 않았다. 1957년 중엽까지 마오쩌둥은 우익 뱀떼를 풀숲에서 튀겨냈다고 선언하고 그 전국적 소탕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많은 저명한 지식인과 예술인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이 상황에 해외 중국인의 여러 집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이 강연 준비를 시작하며 보니 내가 공부의 가파른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루종일 중국사-일본사 강의를 한 다음 밤에는 자정이 넘도록 해외 중국인에 관한 찾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읽고 8회의 강의안을 엮어냈다. 2차대전 전에 중국어로 작성된 자료와 일본어에서 번역된 자료가 특히 중요했다. 이 강연이 호평을 받고 곧 〈A Short History of the Nanyang Chinese〉로 출판되었다. 아주 작은 책자인데도 큰 관심을 모았고, 탈-식민 시대에 동남아시아 전역에 세워지고 있던 국민국가에서 화교사회가 직면하고 있던 딜레마를 연구하는 길로 나를 밀어주었다.
내가 이 강연 요청에 응한 또 하나 이유는 모리스 프리드먼을 만나 그의 남양 중국인사회 연구에서 많은 계시를 얻은 데 있었다. 싱가포르의 중국인을 조사한 필드워크 결과를 담은 두 편의 보고서 중 가족과 결혼을 다룬 한 편이 막 나왔을 때였다. 남중국의 친족 조직에 관한 새 연구의 설명을 그에게 들으며, 이미 알려져 있는 자료로 그런 작업을 해낸 것이 신기했다. 주로 푸젠과 광둥에서 지내본 외국인 관리와 여행자와 선교사들이 남긴 자료였다.
모리스는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함께 공부한 뎬루캉(田汝康)이 사라와크의 중국인에 관한 연구를 막 발표한 소식도 알려주었다. 싱가포르의 중국인 종교시설을 연구하는 마조리 토플리도 소개해 주었다. 화교 관련 문헌을 읽기 시작하며 인류학 연구방법이 역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빅터 퍼셀의 개척자적 연구의 뒤를 잇는 여러 연구자의 동남아시아 중국인에 관한 연구에 이 방법이 쓰였다. 여러 해 후 모리스가 옥스퍼드대학 인류학 교수로 있을 때 중국 사회를 주제로 세미나 시리즈를 조직하면서 내게 올소울즈 칼리지 1년간 방문학자로 초청장을 보냈다. 그 세미나의 다른 참가자들은 인류학자와 중국학자들이었는데, 뜻밖일 정도로 함께 일하기가 편안했다.
인류학이 역사 연구의 확장을 견인하는 현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세기 전반까지 체계적 문헌자료를 근거로 한 왕조-제국 중심의 연구가 역사학계의 주류였으나 이후 연구 대상이 다양해지면서 비-문헌 자료와 사회과학 이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변화에 인류학이 앞장섰다. 이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일어나 온 지역이 동남아시아다.
라디오 사라와크 강연을 준비하면서 중국학과 이어지는 작업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멀어졌다. 나는 잘 가르치고 싶었고 논문 출판 준비에 시간이 필요했지만, 교외 강연으로 사회에 봉사할 의무감도 있었다. 매일같이 뭔가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친구와 가족, 동료와 학생들로부터 받고 있었다.
내게 새롭게 느껴진 일은 유럽 제국들이 해체된 이제 미국이 우리 지역에서 주도권을 갖게 된 것이다. 미국 학자와 언론인들이 꾸준히 학교를 찾아왔다. 대개 두 그룹 중 하나에 속했다. 하나는 대륙을 떠난 중국 연구자들이 우리 지역에서 중국과 관계된 연구 주제를 찾으러 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국가 건설과 관련된 문제들, 특히 공산주의의 위협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모리스는 첫 그룹 중에서 최근 태국의 중국인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윌리엄 스키너와 인도네시아 중국인을 연구한 도널드 윌모트를 소개해 주었다. 둘 다 인류학자였고, 그들의 접근 방법이 흥미로웠다. 버클리의 로버트 스칼라피노로 대표되는 둘째 그룹은 대개 냉전에서 파생되는 위험에 관심을 가졌다.
두 그룹에 들지 않는 사람도 몇 있었다. 역사학자 스탠리 스펙터가 그중 하나인데, 19세기 청나라의 고위 관료, 특히 이홍장(李鴻章)을 연구한 사람이다. 내가 만날 때는 사회과학연구재단(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의 연구비로 영국의 퇴거에 대한 싱가포르 중국인들의 대응 자세를 연구하고 있었다. 스탠리가 좡주린(庄竹林) 선생을 안다고 해서 흥미가 끌렸다. 미국에서 공부한 좡 선생은 중정(中正)중학 교장으로 있다가 내 귀국 직전에 잠깐 특수부서에 체포된 일이 있었다. 훌륭한 교육자로 후에 남양대학 총장을 지냈다. 교육에 대한 좡 선생의 헌신적 태도를 대단히 존경한다는 스탠리의 말에 나는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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