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싱가포르를 떠나 쿠알라룸푸르로…삶과 시대의 전환기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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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I
Move to Kuala Lumpur / 쿠알라룸푸르로 옮겨가다.
싱가포르에서 20개월 살았다. 마거릿은 두 차례 집을 꾸몄는데 어느 집에서도 1년까지 살지 못했다. 우리의 보따리 인생을 예고하는 ‘맛뵈기’였을 수 있다. 그래도 마거릿은 끄떡없이 해냈다. 아내, 엄마, 가사 관리인, 충실한 딸과 며느리, 펄펄 뛰는 6학년 아이들의 교사, 여러 역할을 해내고도 내 학생들에게 차 대접을, 친구들에게 식사 대접을 해주는 능력자였다.
싱가포르에 올 때는 쿠알라룸푸르(KL)로 옮겨갈 생각이 없었다. 싱가포르는 마거릿이 1941년 12월부터 산 곳이고, 그곳에 살림 차릴 것을 고대해 왔다. 내게는 그만큼 깊이 정든 곳은 아니었으나 내가 소속하고자 하는 나라의 핵심부로 보게 되었다. 싱가포르와 연방이 하나 되는 것이 시간문제일 뿐이라면, 지금 KL로 옮길 필요가 뭔가?
선택은 내가 내린 것이었다. 새 국가의 수도라는 매력, 나라를 이끌어갈 학교의 건설에 참여하는 보람, 방대한 배후지로의 접근성, 이런 것들이 합쳐져 KL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역사가로서 직업 선택이 역사적 정체성을 세울 새 국가의 필요와 맞아떨어진 점도 내 결정에 작용한 것 같다. KL에 가서 할 일의 범위를 넓혀 줄 두 가지 경험이 있었다.
하나는 1954년 초 남양 교역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영국에 가기 전 역사학 강사로 있을 때였는데, KL 국립박물관의 코타 바투 유적 발굴에 학생들과 함께 참여했다. 조호르 제국의 수도 조호르 라마의 원래 자리였다. 고고학 연구에 처음 접하면서 그 지역과 중국 사이 고대 교역의 역사를 밝히는 데 좋은 경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라카 함락 이후 2백 년간 포르투갈인의 지배에 대한 말레이인의 저항을 알게 되면서 내가 공부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기도 했다. 말라야 역사에 관한 내 첫 글 “조호르 라마”가 그 결과로 나왔고, 말라야대학 역사학회지에 실렸다.
또 하나 경험은 앞에 적은 것처럼 1958년 앨러스테어 램의 부장 구역 발굴을 도와준 일이다. 1955년에 국립박물관이 대학 역사학과에 일련의 발굴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케다의 그 지역에는 유적이 많아서 고대 인도의 영향을 밝혀내기에 좋은 곳이었다. 중국 도자기 파편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동쪽 해상활동의 증거를 더 찾는 데도 관심이 있었다. 이 발굴의 내 간략한 보고서가 그 해 왕립아시아학회 말라야지부 저널에 실린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다.
두 차례 발굴 경험이 앞서 작업한 고대 중국 교역과 연결될 배경을 찾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문헌자료에 의지해 조각난 글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이런 연구가 역사가 이뤄진 땅을 직접 밟게 해주고 나를 받아준 나라를 더 잘 이해하게 해주는 길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우리 가족의 또 한 차례 이사를 내가 바라게 한 결정적 요인이 무엇인지는 딱 잘라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싱가포르를 떠나는 마거릿의 마음이었다. 일하는 학교도 무척 좋아했고, 그 모친도 가까이 살았고, 우리 부모님 댁도 멀지 않았다. 그가 이사하기 싫은 기색을 보였다면 나는 어쨌을 것인가?
마거릿은 망설이지 않았다. 내 필요가 그에게는 최우선이었다. KL로 가는 것이 내 일에 좋다면 함께 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한 차례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일생을 말라야와 함께할 마음이었고 마거릿도 나와 함께할 뜻을 분명히 했다. 앞으로도 여러 번 이사해야 하고 그때마다 내가 내 일을 할 수 있도록 마거릿이 번번이 자기 경력을 포기해야 할 것을 당시에는 예상할 길이 없었다. 그는 나중에 아이들 읽히려고 쓴 글에서 우리 생활의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겅우는 가능하다면 페탈링자야로 가서 새 대학의 건설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마음 끌리는 전망이라서, KL로 옮기는 데 동의했다. 당시 임신 7개월이라도 건강 상태가 좋아서 또 한 차례 이사를 위해 짐을 싸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이사 비용과 여비를 대주어서 돈은 별로 안 들고 생활의 급격한 변화를 또 한 차례 겪었을 뿐이다.
그때는 우리 차가 두 대였다. 소아스 교수로 가는 존 바텀스의 푀조를 겅우가 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밍을 뒷자리에 앉힌 리노에, 겅우는 푀조에, 세간살이를 가득 싣고 떠났다. 다른 이삿짐과 책과 서류를 실은 트럭이 뒤를 따라왔다. 다섯 번째 이사였다.
KL에서 사교생활이 무척 바빴다. 대학이 오는 것을 모두들 환영했다. 외교관들은 모두 KL에 있었는데, 그중에는 대학 오기 전에 얘기 나눌 상대가 없었다고 했다! 온갖 외교 행사에 초대받아 외교관, 국제사업가, 국내 저명인사들과 인사를 나눴다.”
생활방식의 큰 변화를 가볍게 받아들이는 마거릿다운 모습이다. 젊고 기운이 넘치는 우리 앞에 사건들이 너무 빨리 전개되어 그 장기적 의미를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KL로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같은 나라의 다른 도시로 옮겨가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우리 보기에는 싱가포르가 곧 식민통치를 벗어나 말라야의 새 정부 건설에 앞장설 것 같았다. 입법의회를 위한 선거전은 치열했다. 1959년 5월 중순 KL로 떠날 때 많은 사람들이 리콴유가 이끄는 인민행동당(PAP)의 승리를 예상했다. 화교 사업가 중에는 친-공산당 PAP를 싫어해서 PAP가 집권하면 싱가포르를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두 주일 후 PAP는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내 친구들은 기뻐했고, 수상으로 선출된 리콴유가 구속 중인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취임을 거부할 때는 더욱 열광했다. 새 지도자들에게 바라는 독립의 자세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는 주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인 KL에 도착했고 얼마 후 첫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있었다. 연합당(UMNO, MCA와 MIC의 연합) 승리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내게는 사회주의 정당들이(노동당과 라야트당) 일부 도시 구역에서 유망하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국가정치를 잘 모르는 나는 친구들의 말을 유심히 듣기만 했다. 새집에 자리 잡고 캠퍼스 건설을 돕기 바빠 전국적 민주주의의 첫 실행에서 어떤 결과를 바랄 수 있을지 충분히 공부할 여유가 없었다. 진행이 순조롭고 연합당과 반대당 지도자들 행동이 모두 점잖아서 기대가 커졌다. 나라가 잘 출발하고 있고 내가 집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을 이유가 충분했다.
Whose Region? / 누구의 “지역”인가?
말라야는 독립하고 싱가포르는 자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 지낸 3년 동안 많은 사건이 있었다. 런던에서 열린 말라야 헌법회담. 수에즈 사태. 인도차이나의 운명이 걸린 제네바회담.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반둥회담. 중국에서는 자유주의 환상을 끝장낸 백화제방 운동. 나는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의 형태가 떠오르고 있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극동”지역의 관리를 간편하게 하려는 영국의 노력이 계속되고 2차대전의 승자 미국이 태평양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가운데 말라야가 동남아시아라는 지역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았다. 난징, 홍콩과 마닐라의 경험을 통해 동남아시아가 어떤 성격의 지역이 될지 판단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역할이 제일 클 것은 확실했다. 콜롬보와 델리를 다녀보니 영국의 영향력은 이제 말라야와 북보르네오 식민지에 한정된 것으로 보였다. 태국 군사정권은 미국을 쳐다보는 것이 분명했고,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는 미국 패권에 맞서 아프리카-아시아 반-제국주의 세계를 단결시킬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면 말라야가 속한다고 내가 배운 동남아시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나는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1954년 이후의 가장 큰 변화는 유럽에서 소련과 맞서고 “극동”에서 중국과 맞서는 세력으로서 미국의 등장이었다. 서유럽에서 나토 결성에 성공한 미국은 그 동남아시아판으로 시토(SEATO)를 만들었다. 방콕에 본부를 둔 시토 회원 중 동남아시아 국가는 필리핀과 태국 둘뿐이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참여하지 않았고 인도네시아와 버마는 “신-식민주의” 냄새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제 보니 동남아시아를 중국-인도와 다른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책과 논문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유럽인, 미국인, 아니면 일본인이었다. 지역 내 학자들, 특히 역사학자들은 각자 자기 나라 연구에 바빴다. 수십 년 계속된 상황이었다.
분명한 것은 말라야가 이제 아시아에 남겨진 옛 대영제국의 중심부로서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접점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완전한 중립이란 불가능한 일 같았다. 말라야에서 공산당 봉기를 진압한 것은 영국이었다. 아홉 개 말레이 국가와 전 식민지 둘 또는 셋으로 만들어지는 말라야연방에게는 당분간 영연방 군사력에 의지하는 것이 불가피한 일로 보였다.
말라야대학에서 5년간, 영국에서 3년간 공부하는 동안 학문적 객관성의 가치를 배웠다. 권력을 추구하는 정당을 믿지 않는 습관도 갖게 되었는데, 권력 추구가 나쁜 일이라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 성향이 정치적 대립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이념 대결의 냉전 안에서 말라야 정치의 향방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불분명했다. 동남아시아로 부르도록 우리가 배운 지역은 명확하게 쪼개졌다. KL로 떠나기 전에 동료들과 함께 당시 미국 부통령 리처드 닉슨을 만나는 자리에 초대받은 일이 있다. 닉슨은 미국이 “뮌헨의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북베트남의 남부 접수를 막으려 하는 이유를 설명하러 지역을 순방하고 있었다. 그의 요지는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인도차이나에서 제국의 짐을 넘겨받아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제 곧 냉전 아닌 열전이 닥쳐오리라는 것이었다.
1938년 9월의 뮌헨 협정에서 영국,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에 대한 독일의 침공을 정당화해 주었다. 독일인이 많이 사는 지역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이 협정은 전쟁을 피한 결단으로 찬양받았으나 반년 후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전체를 유린하고 2차대전으로 이어지면서 “뮌헨의 실수”는 비겁한 정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마거릿은 전에 말레이 국가에 살아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차에 태워 싱가포르와 모습이 다른 작은 도시와 마을들을 구경하러 다녔다. 첫 딸이 될 둘째 아이의 출산을 준비하면서 지역 사정에 빨리 적응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이번에는 런던에서 마주친 것과 같은 차갑고 비인간적인 환경이 아니었다. KL에서 손꼽히는 병원에 가서 뛰어난 산과 의사 데렉 리웰린-존스 박사의 직접 진료를 받았다.
1959년 KL에는 수십 개 고등판무관실과 대사관이 있었다. 그들이 대표하는 몇 나라에서 캠퍼스 건설에 도움을 제공했다. 우리 과는 미국학 강의를 위해 해마다 풀브라이트재단 파견교수를 받았다. 첫 파견교수는 토머스 제퍼슨 전기로 잘 알려진 솔 패도버였다. 그의 존재 덕분에 우리에게 새 길 하나가 열렸다. 영국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넉넉한 미국의 지원이었다.
나도 그 초기 수혜자의 하나다. 나는 전에 아시아재단의 존 서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코넬대학에서 인도네시아 연구로 막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우리 대학을 자기네 동남아시아 프로그램에 연계시키고 싶어 했다. 내가 미국에 가본 일이 없는 역사학자라는 사실을 그가 떠올리고 아이디어를 냈다. 미국의 중요한 아시아 관계 연구소를 둘러보고 재단에 보고서를 내 달라는 것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의 영국에 있는 동안 미국 사회과학 연구자들이 행한 중국 현대사와 현대 중국 연구성과를 읽어본 내 입장에서 미국의 아시아 연구 현황을 알 필요 때문에 꼭 하고 싶은 일이라고 그에게 대답했다.
4주일 후 그가 4개월 여행을 제안하며 가보고 싶은 곳을 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학과장 존 배스틴을 찾아가 의논했다. 내가 1959년 5월에 와서 싱가포르의 2학년 학생들을 가르치러 다니고 있었고 우리 2학년 가르치는 일은 이듬해에야 시작할 참이었기 때문에 배스틴은 1960년의 첫 4개월간 내게 특별휴가를 주도록 부총장에게 요청했다. 무척 고마운 도움이었다.
이 여행을 통해 현대 학문에 대한 내 식견이 넓어지고 경력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미국의 학문적 상황을 잘 모르는 동남아시아 출신 학자였지만, 존 서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지역의 민족주의 투쟁과 이념 투쟁에 관해 유용한 관점을 그곳 학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 여행을 허가해 준 아내를 가진 것은 내 복이었다. 놀라울 정도의 행동력과 결단력을 가진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었다. 4개월 동안 내가 하는 일을 가벼운 마음으로 적어 보냈고, 그는 잘 지내고 있다고 늘 확인해 주었다. 그 덕분에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배울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을 학계에 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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