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두 ‘쇼트트랙 보석’ 지킬 어른은 없었다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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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는 쇼트트랙 국가대표 황대헌(27)과 린샤오쥔(30·한국명 임효준) 사이에 불거진 성추행 논란과 관련해 핵심 증거인 충북 진천선수촌 CCTV 영상을 단독 입수해 지난 7일 공개했다. 해당 영상은 본지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계정 등에서 조회수 300만건 이상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19년 발생해 무려 7년이 지난 상황에 대해 여전히 대중이 관심을 갖는 건 단지 자극적인 사건에 대한 호기심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들끼리 법정 공방을 벌이고, 그 중 한 선수는 국적을 바꾸는 등 이례적 상황으로 번진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다는 방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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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진천선수촌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CCTV를 중앙일보가 입수했다. 황대헌이 암벽등반 기구에 오른 여자 선수 E의 엉덩이를 때려 매트에 떨어졌고(왼쪽 사진), 이후 린샤오쥔(한국명 임효준)이 황대헌의 바지를 내리자 황대헌은 황급히 바지를 추슬렀다. 사진 CCTV 화면 캡처

지난 6일 황대헌이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 잡고 싶다”며 낸 입장문은 영상 공개 이후 역풍을 맞았다. 입장문 속 몇몇 주장과 영상 속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중국 시나스포츠와 텐센트 뉴스는 “황대헌이 코스프레 한다”며 공세를 퍼부었다. 황대헌 바지를 내리는 행동으로 논란의 원인을 제공한 린샤오쥔 역시 면죄부를 받긴 어렵다.

그런데 CCTV가 비추는 영상 너머,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 더 있다. 논란을 부른 행동들은 코치들의 인솔 하에 공식 팀 훈련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발생했다.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선을 넘는 장난을 주고 받는 동안, 이를 적절히 통제할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대표팀 관계자가 “요즘 시대에 그러면 안 된다”며 맥빠진 주의를 준 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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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헌, 린샤오쥔

사후 대응은 더 부실했다. 린샤오쥔측 주장에 따르면, 당시 대표팀 지도자는 당사자 간 화해를 중재하기보다 ‘확인서 서명’ 등을 앞세우며 면피에 급급했다. 여론의 눈치를 살피던 대한체육회는 ‘선수단 전원 진천선수촌 퇴촌’이라는 황당한 결정과 함께 발을 뺐다. 대한빙상경기연맹은 제대로 된 확인 과정 없이 린샤오쥔에게 선수 자격 정지 1년 징계를 내렸다. 선수단 훈련 관리에 실패한 책임은 현장을 이끈 코칭스태프에 있는데, 이들 중 징계를 받는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 과정에서 권한과 책임을 바탕으로 올바른 목소리를 내야 할 인사들은 모두 침묵했다. “경고로 끝날 일이었는데 주변에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임효준을 떠나게 만들었다”는 신치용 당시 진천선수촌장의 뒤늦은 고백은 당시에 내려진 여러 결정들이 ‘정의’가 아닌 ‘정치’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으로 한국 쇼트트랙이 발굴한 두 개의 보석이 망가졌다. 한쪽은 가해자라는 낙인 속에 고국을 등졌고, 다른 한 명은 여전히 그날의 상처와 논란의 꼬리표를 떼지 못한 채 빙판 위에 서 있다. 2021년 대법원의 확정 판결로 린샤오쥔의 무죄가 결정됐지만, 법적 판단과는 별개로 여전히 두 선수는 각기 다른 방식의 지옥에 갇혀 있다.

만약 그날 진천에 ‘진짜 어른’이 있었다면 두 선수가 국경을 달리하며 서로에 칼 끝을 겨누는 비극은 없었을 거다. CCTV 렌즈는 7년 전 그날의 진실을 투명하게 비추고 있다. 그러나 ‘암전’된 것처럼 눈을 감아버린 어른들은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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