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한 경기에 사사구 18개? 투수의 싸울 자격은 무엇인가

본문

야구에 볼넷과 비슷한 개념이 생긴 건 1863년이다. ‘볼로 판정된 공이 3개를 넘으면 타자를 1루로 보낸다’는 규칙이 새로 등장했다. 투수가 일부러 몸쪽 볼을 남발하면서 타자를 자극하는 신경전을 막자는 의도였다. 취지는 좋았는데, ‘볼 3개는 너무 가혹하다’는 투수들의 불만이 커졌다. 1871년 최초의 프로야구리그 내셔널 어소시에이션이 출범하면서 그 숫자가 9개로 대폭 늘었다.

bt180a9e29879283b01ae3f2109cbfb79f.jpg

한화가 사사구 18개를 허용한 4월 12일 대전 삼성전 기록지 일부. 추격과 역전을 허용한 7~9회에 볼넷을 의미하는 'B'자가 즐비하다. 배영은 기자

이번엔 다른 문제가 생겼다. 경기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1880년 8개→1882년 7개→1884년 6개→1886년 7개→1887년 5개 순으로 조정을 거듭했다. 1889년 볼 수가 4개까지 줄어든 뒤에야 비로소 오늘날까지 변하지 않은 새 룰이 정착됐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다다른 결론. 투수가 같은 타자에게 볼 4개를 던지면, 정면승부할 자격을 잃는다는 의미다. 투수에게 볼넷은 사실상 ‘기권패’다.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 투수들은 지난 12일 대전 삼성 라이온즈전에서 타자와 싸울 권리를 16차례나 반납했다. 투수 9명이 볼넷 16개와 몸에 맞는 공 2개를 내줘 역대 한 경기 최다 사사구(18개) 기록을 새로 썼다. 종전 최다 기록은 LG 트윈스가 1990년 5월 5일 잠실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남긴 17개였는데, 36년 가까이 남아있던 불명예 기록을 한화가 갈아치웠다.

볼넷은 투수 입장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출루 방식이다. 상대 타자에게 힘 한 번 쓰지 않고 걸어나갈 기회를 준다. 반면 투수의 소속팀은 잃는 게 너무 많다. 볼넷이 쌓이면 수비 시간이 한없이 늘어나고, 야수들의 타격 집중력도 떨어진다. 메이저리그를 호령하고 돌아온 한화 류현진은 “야구를 시작할 때부터 ‘볼넷을 주느니 차라리 안타를 맞으라’는 얘기를 반복적으로 들었다”고 했다. 올해 데뷔 21년째인 그는 가장 최근 등판(지난 7일 인천 SSG 랜더스전)에서 6이닝 동안 볼넷을 2개만 내줬다.

bt3311dcc43ae328137d07da3c15e9a9c4.jpg

한화가 사사구 18개를 허용한 4월 12일 대전 삼성전 기록지 일부. 마무리 김서현이 선발투수보다 더 많은 사사구를 내줬다. 배영은 기자

한화 4년 차 마무리 투수 김서현은 어땠을까. 그는 12일 경기에서 아웃카운트 3개를 잡는 동안 볼넷 6개와 몸에 맞는 공 1개로 3실점 하고 역전까지 허용했다. 막판엔 전의를 잃은 듯 스트라이크존을 한참 벗어나는 폭투성 공을 연거푸 던졌다. 포수 최재훈이 공을 잡느라 몸을 좌우로 이리저리 날렸고, 외야수들은 연신 아픈 다리를 두들겼다. 상대팀 삼성도 잔루 17개를 기록하는 졸전을 펼쳤지만, 한화의 볼넷 퍼레이드 덕에 어부지리로 역전승했다. 김경문 한화 감독은 13일 “마무리 투수를 바꾼다”고 했다.

김서현은 지난해 5월 최고 시속 160.5㎞를 찍은 강속구 투수다. 올 시즌엔 최고 시속이 155㎞까지 나왔다. 제구가 되지 않는 강속구는 투수의 무기가 될 수 없다. 가뜩이나 최근 KBO리그는 잇단 수비 실책과 쏟아지는 볼넷 탓에 “경기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관중 수는 역대 최고 페이스로 달려가는데, 경기력이 인기에 크게 못 미친다. 만원 관중의 환호를 받으려면, 일단 ‘프로다운' 경기를 하는 게 먼저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에게 싸움의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6,489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