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말들의 전쟁이었다"…미국에서 마주친 민주주의 단상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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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t Coast Centers / 미국 동부의 연구중심지

두 달이 지나 마침내 미국 동해안에 도착했다. 이상하게도 수도인 워싱턴DC에 중국사나 동남아시아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스미소니언박물관은 포기하고 의회도서관에 많은 시간을 썼다. 중국 관계 서적을 세계에서 제일 잘 갖춘 도서관의 하나였다. 역사 분야 도서에 집중하며 그곳에서 연구할 날이 오기 바라는 마음이 일어났다.

다음 목적지는 뉴욕이었다. 동북부 유명 대학들에 관해 읽으며 이번 여행의 정점이 될 것을 예상했다. 오는 동안에 만난 연구자 중에도 그 학교들 출신이 많았고, 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을 베이스캠프로 삼은 나는 컬럼비아대학을 위시해서 방문할 학교들을 골라야 했다. 아시아재단 관계자의 조언을 들으며 프린스턴, 예일, 하버드와 코넬을 골랐다. 돌이켜보면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을 빠트린 것이 아쉽다.

그때부터 4주일 동안 나는 정보를 빨아들이는 스펀지가 되었고 매우 중요한 정보가 많았다. 4개 대학에 관해 들은 소문이 모두 사실이었다. 곳곳에서 늘어나는 슈퍼파워 미국의 역할에 편승한 학술활동 확대의 주축이 된 이 대학들은 식민 이후 아시아를 연구하는 우수한 기관들을 속속 만들었다. 현대중국 연구를 위한 포드재단 연구비가 새 세대 대학원생들을 키워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시애틀과 버클리에서 들었었다. 컬럼비아와 하버드를 위시한 어느 기관에서나 그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 연구를 놓고 본다면 그 여행 무렵에 중국학 중심의 연구 풍조가 지역학으로 넘어각고 있었다. 지역학에는 근대와 현대 상황을 해명하는 데 사회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국 연구의 모든 방면에서 하버드가 확연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존 킹 페어뱅크의 주도하에 변화가 일찍 시작되었다. 컬럼비아와 예일도 같은 방향의 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와 비교하면 시애틀의 워싱턴대학이 근대로 방향을 바꾸고 사회과학을 동원한 빠른 속도가 놀라웠다. 버클리 역시 로버트 스칼라피노 같은 정책 전문가들을 앞세워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새 역할에 빠른 반응을 보이며 동남아시아에도 관심을 늘리고 있었다. 시카고에서도 인도 역사와 사회 연구 분야에서 이미 겪은 변화와 같은 방향으로 사회과학의 역할을 늘릴 조짐이 느껴졌다. 프린스턴의 행보는 좀 조심스러워 보였지만, 두 번 방문 때마다 역시 그 방향 변화가 멀지 않았다고 느꼈다.

예일도 두 차례 방문했다. 아서 라이트와 메리 라이트 부부를 스탠퍼드에서 불러온 것은 대단한 일이다. 두 사람의 힘으로 중국 연구의 전일적(全一的) 관점을 세울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탠퍼드에서 그들의 이동 사실을 들었는데, 모두 아쉬워하고 있었다. 에일의 또 하나 특별한 점은 동남아시아 연구의 중심지가 될 희망을 지키며 해리 벤다에게 그 일을 맡긴 사실이다.

코넬도 예일처럼 중국인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사업을 일찍 시작했다. 많은 졸업생이 중국 정부와 학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유럽식 중국학 전통에 매인 일이 없는 코넬에서는 다른 곳보다 일찍 사회과학자들이 현대중국 연구에 투입되었다. 1954년 내가 소아스에 갈 때 코넬은 현대 동남아시아 연구의 중심지로 이미 알려지고 있었으나 중국 연구 중심지로서 평판은 기울고 있었다.

동남아시아 출신이면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나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함께 연구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본다. 남중국해 초기 교역을 연구하면서 중국 남해안이 무대의 3분의 1이고 동남아시아가 그 나머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의 왕조가 남쪽의 정치적 변화를 소홀히 여김으로써 손해를 본 측면을 그 연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코넬이 거둔 성과와 예일과 버클리가 모색하는 방향을 높이 평가했다. 나중에 미시건대학도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 것을 확인하고 첫 여행에서 빠트린 것을 아쉬워했다.

미국의 아시아 연구에서 극동(중국과 일본)이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반면 동남아시아는 한구석의 얼룩 정도였다. 4월 중순 뉴욕에서 열린 아시아연구협회(AAS) 모임에서 확연히 드러난 사실이다. 동남아시아 관련 발표자는 몇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해리 벤다, 빌 스키너, 존 케이디, 노먼 파머, 로버트 반 니얼 등 활발한 연구자 몇 사람과 다음 단계를 주도할 당시의 대학원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처음 참석한 AAS 모임이었는데, 어떤 새로운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가 정보를 얻는 것만이 아니라 “동양학”에서 사회과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행사였다. 일일이 찾아다닐 수 없는 이 거대한 나라의 여러 곳에서 온 학자들을 만나는 것도 큰 혜택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하버드 방문을 위한 준비도 되었다.

내가 하버드를 일정의 마지막으로 한 것을 하버드 친구들은 이 여행의 클라이맥스로 삼으려는 뜻이라고 해석할지 모른다. 확실히 중요한 일정이었다. 존 페어뱅크가 출타 중이어서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벤저민 슈워츠는 만났다. 4년 전 대학원생으로 파리 학회에서 만난 슈워츠는 중국 공산주의 연구자이면서도 내 오대 연구를 격려해 주었다. 세미나에서 10세기의 유학자 풍도(馮道)에 관한 발표를 했을 때 슈워츠가 던진 몇 개 질문은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해온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충실한 2주간이었다. 양롄성(楊聯陞)의 강의도, 첸무(錢穆)의 강연도, 하버드-옌칭 도서관의 희귀본 컬렉션도 모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다음 세대를 이끌 뛰어난 대학원생들과의 만남이었다. 필립 큔, 데이비드 로이(후에 시카고로), 위잉스(余英時, 예일과 프린스턴으로), 로이드 이스트먼(일리노이로)과 어니스트 영(미시건으로)이 있었다. 그들은 학교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고 보스턴 일대의 허름하면서 음식이 좋은 중국식당에도 데려가 주었다. 필립, 데이비드, 로이드와의 마지막 저녁이 하버드의 중국 연구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내게 알려준 절정의 시간이었다.

4개월 여행의 득실을 생각할 때, 미국 동해안에 도착할 무렵에는 미국의 아시아 연구 현황이라는 주제를 벗어나 민주정치의 한 특별한 유형에서 나타나는 공공연한 미스테리에 관심이 쏠릴 때가 많이 있었다. 내가 아는 민주주의란 영국의 의회제도와 책에나 나오는 고대그리스 민주제도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미국에서 마주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말들의 전쟁”에 연예와 축구 결승전의 교배종을 뒤섞어 놓은 듯한 이 정치 형태에 강한 중독성이 있다는 사실을 여행을 끝낼 무렵에는 확인하고 있었다. 아시아재단의 여비 지원 취지는 아니었겠지만, 그 후 50년간 미국의 드높은 정치 이념과 내게는 종종 “선동정치”로 보이는 현실정치를 떼어서 볼 수 있게 된 것이 그 여행의 한 가지 성과였다.

몇 해 후 CIA가 반공 선전을 위해 많은 문화단체와 교육단체에 자금을 제공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무렵까지는 냉전의 성격이 분명해졌고, 나도 정치적 순진성을 꽤 벗어나 있었다. 유럽과 몇 개 라틴아메리카 국가에서 CIA의 활동이 보도되었다. 우리 지역에서는 홍콩과 타이완이 빤한 표적이었고, 티베트, 라오스와 베트남, 그리고 최근에 큰 성공을 거둔 인도네시아의 사례들을 알게 되었다. 아시아재단의 배후에도 CIA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았다. 그런데 Congress for Cultural Freedom (CCF)가 CIA 작품이라는 사실에는 깜짝 놀랐다. CCF의 〈엔카운터〉 잡지를 꾸준히 읽으면서 CIA와 연계는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세상을 비관까지 하게 되지는 않았으나 우리 모두가 어떤 정치적 위협에 직면해 있는지는 절감했다.

Margaret’s America / 마거릿이 본 미국  

몇 해 후 마거릿에게 미국의 몇 개 영어 교육기관을 시찰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그는 외국어로서 영어 교육이라는 자기 분야에서 위상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2년 후인 1967년 소아스, 오스트레일리아국립대학과 컬럼비아대학의 교수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 마거릿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살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보며 깜짝 놀랐다. 캔버라로 가는 데는 동의했다. 1965년 관찰한 미국 사회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반감을 표시한 것이 아이들 읽으라고 적어 놓은 내용 중에 있다.

“1965년 3월에 하와이대학에서 한 가지 일을 해달라는 초청장을 갑자기 받았다. KL의 말라야대학 동물학 교수로 있으면서 켈란탄과 트렝가누의 코끼리거북 이동 패턴을 연구하던 조니 헨드릭슨이 하와이대학 부총장으로 가 있었다. 그 학교에서는 부총장(vice-chancellor)이란 직함을 학교 전체의 수장이 아니라 학부장 같은 직책의 표시로 썼다. 그러니 영국식으로 본다면 교무처장(academic dean) 같은 위치였다.

하와이에 아시아계 주민이 많아서 외국어 또는 제2국어로서 영어교육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니도 관심을 가진 것이었다. 미국으로 유학하는 많은 외국 학생에게 영어 능력의 향상 과정이 필요했고, 이 분야의 발전에 미국이 앞서 있었다. 많은 언어학자들이 언어의 성격 등에 관한 연구 결과를 내놓기 시작했고, 나 자신도 이 분야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있었다.

내가 받은 과제는 여러 대학을 방문해 그 분야 과목들을 검토해서 하와이대학의 개선 방법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날지 열심히 알아보았다. 결국 UCLA, UC 버클리, 미시건, 하버드-래드클리프, 그리고 컬럼비아로 방문지를 정했다. 사람도 만나고 강의도 참관하려면 한 곳에 적어도 이틀은 필요했으므로 두 주일에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적었다. 하와이대학에서 하루 20달러씩 지불하기로 했다. 모텔 숙박비가 8달러, 커피 한 잔이 25센트인 시절이었으니 충분한 비용이었다.  

첫 목적지는 LA였다. UCLA 영어학과를 찾아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 몇 개 교실에도 들어가 보았다. 영어가 이미 세계 공용어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배우려는 사람이 많았다. 교역과 기술, 그리고 연예 분야에서 필수적 언어가 되고 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 언어 교육과 그 문제들에 관한 온갖 회의에 참석하러 다니고 있는 똑같은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마치 하나의 산업 분야처럼 학자들이 이 회의 저 회의로 몰려다니는데, 실제로 배우는 것은 없어도 네트워크를(1965년 당시에는 쓰지 않던 말이다!) 만들어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뉴욕 도착 후 많은 행사에서 같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때 그들과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며 아주 편안해졌다. 대부분 여성이고 학계 주변부에서 일자리, 특히 정규직을 얻으려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여성의 진로에 아직 제한이 있었고, 당시에는 사업과 금융 분야에도 여성의 역할이 적었다. 많은 여성에게 교육이 익숙한 분야였다. 아시아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도 같은 형편이었다.

KL로 돌아온 후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몇 가지 제안은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안다. 행정 체질이 아닌 조니 헨드릭슨은 그 후 애리조나대학으로 옮겨가 원래 좋아하던 코끼리거북 연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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