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자무싸, '갇혔을때 돌파하라'는 구원의 메시지 [송원섭의 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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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의 한 장면. 사진 JTBC

박해영 작가의 히트작 ‘나의 아저씨’에는 철길 건널목이 자주 등장합니다. 대개는 헤어짐의 장소입니다. 기차가 다가오면 철길에는 차단기가 내려오고, 이쪽의 세계와 저쪽의 세계는 갈라집니다. 동훈(이선균)과 지안(이지은)도 드라마 내내 자주 철길에서 마주치고, 마지막에 헤어지는 장소도 철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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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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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유명한 철길 건널목 장면. 사진 tvN

박 작가의 신작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연출 차영훈, 이하 ‘모자무싸’)’에도 장소는 다르지만 첫 회부터 철길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동만(구교환)과은아(고윤정)이 처음 만나는 장소입니다. 여기서는 차단기가 두 사람 앞으로 내려와 있고, 그 위에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처음 보는 사람은 저게 무슨 말인가 싶지만, 상황을 상상하면 이해가 갑니다. 만약 차를 운전해 철길을 건너려는데 차단기가 내려와 철길 위에 갇히게 되면, 당황하지 말고 차단기를 들이받고라도 나와서 자신의 생명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서는, 큰 위기에 놓인 사람은 차단기의 손상 같은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말고 과감한 결단으로 자신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의미로 읽힙니다. 뭘 해서라도. 무슨 짓을 해서라도.

‘모자무싸’는 누가 봐도 구조, 혹은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동만은 20년째 시나리오를 쓰고 있지만, 감독 데뷔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늙은 지망생이죠. 성공한 주위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과 질투를 감추지 못해 진상 취급을 받고, 결국 세상에서 버림받을 위기에 놓입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영화사 프로듀서 은아만은 동만의 진상 짓이 ‘제발 살려달라’는 구조신호라는 것을 알아듣습니다. 그가 ‘공포에 쩔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거죠.

(‘20년’, ‘영화 감독’이라는 키워드 때문에 동문을 ‘나의 아저씨’에서 동훈의막내 동생기훈으로 연결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지만 기훈과 동문은 그 절박함에서 꽤 큰 차이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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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TBC

꼭 영화계가 아니라도, 자신을 인정받지 못한 천재라고 생각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는 꽤 와 닿는 비유입니다. 우리 인간이란 누구나 매일, 매 순간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의심 사이에서 일희일비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라면 이 의심을 자연스럽게 에너지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을 인도하겠지만, 불행히도 우리 중 대부분은 그저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남들의 인정과 격려를 얻으려 노력합니다.

이 과정, 그러니까 ‘나는 혹시 아무 가치가 없는 존재가 아닐까’하는 의심과 싸우고, ‘나는 이렇게 쓸모 있는 존재야’라는 자기효능감을 획득하는 데 조력자의 도움은 필수적입니다. 박해영 월드는 지금까지 줄곧 그런 멋진 조력자들을 우리에게 보여줘 왔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세상 누구로부터도 도움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이 없는 지안이 동훈을 만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가는 이야기였고, ‘나의 해방일지’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추앙’이란 곧 ‘내가 얼마나 유용하고 유능한 존재인지 내게 직접 말해줘’라는 말의 다른 표현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 나를 도와줄 타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합니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박사(건국대 교수)는 최근 저서 ‘스트레스는 어떻게 나를 바꾸는가’에서 어려운 상황을 돌파해야 할 때, 제삼자의 도움을 받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질적인 도움이 시작되기 전, 일단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혹은 타인의 도움 제의를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신체 지표가 호전된다는 것이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누군가 내 곁에 있어 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혈압과 심박 수가 떨어지고 코르티솔 분비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자무싸’의 초반 분위기로 볼 때, 은아는 동만을 도우면서 자기 자신도 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결국 앞으로의 이야기는 과연 은아가 어떻게 동만을 갇혀 있는 차단기 안에서 끌어 낼지로 이어지게 되겠죠. 그리고 동만에게 진짜 재능이 있을지, 아니면 그저 없는 재능을 한탄하는 루저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끝은 영화 ‘록키’(1974)처럼 언더독의 화려한 승리일수도, 혹은 영화 ‘인사이드 르윈’(2013)처럼 자신도 재능이 있지만 그 재능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 될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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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무싸' 동만 역의 구교환. 사진 JTBC

동만 역의 구교환은 정말 특유의 ‘징글징글한’ 연기력을 뽐냅니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악만 남은 이무기’ 연기가 너무나 리얼해서, 극중 주위 사람들이 대체 왜 동만과 당장 의절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지 신기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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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무싸' 은아 역의 고윤정. 사진 JTBC

고윤정의 연기 또한 전형적인 ‘구원의 여인’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관심을 끕니다. ‘이 사랑 통역 되나요’나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에서도 나오지만, 극도로 제한된 감정표현만으로도 최고의 전달력을 보여주는 Z세대 연기의 전범으로 추앙할 만 합니다. 에너지 효율 1위의 배우라고나 할까요.

‘내 인생이 왜 니 맘에 들어야 하는데요.’라는 1회 마지막 대사가 과연 어떤 결말로 연결될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청자에게 유일한 위안이라면 박해영 작가는 지금까지 주인공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가 있습니다. 그렇게 앞으로 6주 동안, 저는 자진해서 그 포로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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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JTBC

P.S. 다시 건널목 차단기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갇혔을 때 돌파하세요’. 그 철길에 서 있던 어떤 사람에게도 누군가 그 말을 진심으로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혹시 이 장면이 그 사람에게 보내는 추도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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