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광화문 한글·한자 ‘쌍현판’ 설치는 미완의 타협일 뿐

본문

bt0265433deb0a2ec086b3ff0351abebce.jpg

문소영 논설위원

19일 지리산 기슭의 천년 고찰 실상사가 템플스테이관 ‘휴휴당(休休堂)’에 새 한글 현판과 주련(柱聯·한옥 기둥에 좋은 글귀를 세로로 거는 것)을 달고 기념 법회를 열었다. 언뜻 보면 그냥 한자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현판 양 끝의 ‘휴’와 ‘당’은 한자이고, 가운데 글자는 한글 ‘휴’ 두 개를 좌우대칭으로 합친 것이다.  한글과 한자의 기발한 결합이 장난스러우면서도 멋스럽다.

한글·한자 좌우 읽는 방향 달라
다른 방향에서 읽는 분열 초래
전통 복원한 유산, 한자가 타당
문체부 여론 수렴 질문 치우쳐

btde4bb3f69e3afe16a98004572188feea.jpg

btb8b0e82b3825a9a7ca466aff2539cad5.jpg

지리산 실상사의 템플스테이관인 ‘휴휴당(休休堂)’에 새로 설치된 현판과 주련. 현판은 한글과 한자가 기발하게 결합돼 있다. 주련은 한글이다. [사진 실상사]

주련 또한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고마워 고마워” 같은 도법 스님(실상사 회주)의 시구를 일반 한글과 좌우 반전 한글로 겹쳐 쓴 것이다. 현판과 주련 모두 김종원 서예가(전 경남도립미술관 관장)가 쓰고 김각한 각자장이 목판에 새겼다. 김 서예가는 “주련의 경우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실상사에서 만장일치로 받아들였고, 어린이들이 오히려 쉽게 읽어내며 재미있어한다더라”고 전했다.

실상사의 한글 현판 실험
이 현판과 주련은 실상사가 2020년부터 진행해온 ‘문자 반야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사찰 건축에서 “전통의 뿌리를 지키되 새로운 시대 정신을 담아내려는 시도”다. 김종원 서예가는 지난해 ‘한글진흥 국제교류 포럼’에서 “한글은 구축적 조합이고 운율미를 드러낸다”며 그 예술적 가능성이 크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배경이 있으니 그가 요즘 한창인 광화문 현판 논란에서 한글 현판에 찬성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반대 입장을 밝혔다. “광화문 문루(6·25 전쟁으로 소실되었다가 2010년 목조 복원)를 아예 현대적 형태로 복원했다면 모를까, 전통에 따라 복원했으면 현판도 그 전통을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고 했다. 새로운 건물에 다양한 한글 현판을 시도하는 건 좋지만 광화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 광화문에는 조선 고종 때 경복궁 중건을 책임진 훈련대장 임태영이 썼던 한자 현판의 복원본이 걸려 있다.

김 서예가는 말을 이었다.

“광화문의 ‘광화(光化)’는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서 따온 말로 ‘임금의 빛나는 덕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유교 통치 이념을 표현한 말입니다. 광화문은 그 현판과 더불어 조선의 유교 질서를 상징하는 건물이에요. 그걸 단지 한글로 바꾼다고 진정한 현대화가 될까요? 오히려 글의 의미만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우리말의 절반 이상이 한자어인데, 한글 전용 정책으로 그 본래 의미를 모른 채 쓰니까 오히려 문해력 등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자도 우리 문화의 일부입니다. 그걸 꼭 한글 간판으로 교체해야만 우리 정체성을 살리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지금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현판 국민모임’이 추진하고 문화체육관광부도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쌍현판’ 방안, 즉 기존 한자 현판에 한글 현판을 추가하는 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김 서예가는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일단 미학적으로 이상하다”고 잘라 말했다. “한자 현판은 전통적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현대 한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습니다. 같은 문에 같은 이름을 서로 다른 방향 감각으로 병치하게 되는 겁니다.”

bta7bccdf29cdb20b26d3ad5922f8eb533.jpg

광화문에 기존 현판 외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할 경우를 예시한 이미지. [사진 광화문 훈민정음체 한글현판 국민모임]

김종원 서예가의 입장은 지난달 31일 문체부 주최 토론회에서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홍석주 서일대 교수 등의 문제의식과 결을 같이한다. 이들은 문화유산은 시대정신을 덧씌우는 캔버스가 아니라 복원 원칙을 지켜야 할 역사적 증거라고 반박했다. “시류에 따라 문화유산을 변형하는 것은 과거의 물질 증거를 조작하는 것”(최종덕)이며 “2045년까지 진행 중인 경복궁 복원에서 일관성을 해칠 수 있다”(홍석주)는 것이다.

물론 토론회에서 나온 한글 현판 찬성론도 귀 기울일 가치가 충분하다. 요약하면 광화문은 더 이상 조선 궁궐의 정문으로만 볼 수 없고 대한민국의 국가 상징 공간이 되었으므로 “대한민국 국가 정체성의 기본인 한글이 국가 상징 공간에 없는 것은 옳지 않다”(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는 것이다. 경복궁을 “혁신의 산물인 훈민정음이 창제·반포된 곳”(김주원 한글학회장), 또 “세계인에게 K컬처의 성지”(김형우 한반도문화관광연구원장)로 보아야 하므로 한글 현판이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문체부는 이런 두 입장을 가장 손쉽게 절충하는 ‘쌍현판’ 제안에 기울어진 듯하다. 토론회 정식 제목부터 ‘한글 현판 추가 설치 의견 수렴을 위한 광화문 현판 토론회’였다. 문체부 웹사이트의 국민 의견 수렴 대화방도 ‘교체’가 아니라 “광화문에 한글 현판 함께 달기”에 대한 의견을 묻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정쩡한 해법이다. 쌍현판론은 갈등을 해결하는 절충안이 아니라, 광화문을 무엇으로 볼지 결정하지 못한 채 상징과 복원을 동시에 취하려는 미완의 타협이다. 현판은 건물의 얼굴인데 같은 이름을 위아래 두 번 걸겠다는 것, 더구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읽는 현판을 두 개 건다는 것은 단일한 상징을 강화하기는커녕 분열시킨다. 한글현판 국민모임의 예시안처럼 위에는 한자, 아래에는 한글을 단다면 위계 논란도 피할 수 없다. 이강민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도 “한자 현판 아래 한글 현판을 덧붙이는 것은 단순한 발음기호 표기에 불과하며, 이는 오히려 한글의 주체적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차라리 주기적 교체는 어떤가
그러니 이제는 선택해야 한다. 광화문을 복원 문화유산으로 본다면 지금처럼 전통 복원 원칙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 반대로 현대 국가의 상징물로 재정의하겠다면 한글 현판으로 교체하고 아예 파격적인 시도를 해보는 편이 낫다. 한 문화계 인사는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처럼 다양한 사람의 한글 현판을 주기적으로 바꾸면 어떨까”라고 했는데, 오히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상사 현판 실험처럼 다양한 서예가, 현대미술가, 타이포그래피 전문 디자이너가 참여해 한글의 예술적 가능성을 넓히는 것이다.

정부는 광화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복원인가 재창조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두 개의 현판을 걸어 안일하게 절충하는 것은 오히려 광화문의 미학과 상징 표지로서의 기능을 망치는 결과를 나을 수 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5,824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