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공장 멈추고 희망퇴직…전쟁 끝나도 곧장 부활 못해” 여수산단 비명 [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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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사태 장기화로 나프타 수급 차질이 빚어지면서 전남 여수산단 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공장이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지난달 여수산단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 13일 오후 3시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GS칼텍스 원유부두. 대형 선박 모양을 한 길이 300여m의 원유부두가 텅 비어 있었다. 해외에서 원유를 싣고 온 선박들이 오가던 여수산단 앞바다에도 유조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근 경비업체 관계자는 “평소 여수산단을 오가던 대형 유조선이 중동 사태 후 크게 줄었다”며 “글로벌 원유 공급이 예년보다 30~40% 이상 감소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같은 날 오후 국내 최대 에틸렌 제조사인 여수산단 내 여천NCC 3공장 앞. 공장 가동을 멈춘 탓에 평소 공장 굴뚝에서 내뿜던 하얀 수증기가 보이지 않았다. 공장 출입문은 열려 있었지만, 제품을 실어나르는 화물차량도 볼 수 없었다. 인근에 입주한 LG화학, 롯데케미칼 등도 가동을 중단하거나 생산량을 줄인 여파로 공장 안팎과 도로 곳곳이 한산했다.
전남 여수시 여수국가산업단지 내 여천NCC 3공장이 가동을 멈춰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희규 기자
국내 최대 석유화학단지인 여수산단이 중동 사태 여파로 패닉상태에 빠졌다. 여수산단에는 원유에서 나오는 나프타(naphtha·납사)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몰려 있다. 여수산단에서는 플라스틱 기초 소재인 에틸렌을 지난해에만 640만t가량 생산해냈다. 충남 서산의 대산산단(470만t)과 울산산단(170만t)을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다.
나프타는 각종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 원료로, ‘산업의 쌀’로 불린다. 나프타분해시설(NCC)을 통해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을 생산하는 핵심 기초원료로 사용된다. 한국은 국내 나프타 수요 중 55%를 수입하며, 이중 77%를 중동에서 수입한다. 이 때문에 중동 사태 후 여수산단을 비롯한 국내 나프타 수급에 직접적인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여수산단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후 극심한 이중고에 빠진 상황이다. 석유화학 경기가 중국발 물량 공세에 밀려 3년 이상 불황에 빠진 상황에서 원유 수급까지 차질을 빚으면서 공장을 돌리는 게 어려워졌다.
중동 사태 장기화로 나프타 수급 차질이 빚어지면서 전남 여수산단 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공장이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지난 1일 여천NCC 나프타 가공 설비의 모습. 연합뉴스
중동 사태 후 여수산단 내 업체들은 생산량을 대폭 감축하고 있다. LG화학은 지난달 23일 연간 80만t의 에틸렌을 생산하는 2공장의 가동을 멈췄다. 여천NCC는 지난해 8월 3공장(연산 47만t)의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1·2공장의 가동률을 낮춰가고 있다.
연간 에틸렌 123만t을 생산하는 롯데케미칼도 지난달 27일 정비 작업을 앞세워 공장 가동을 중단했다.
중동 사태 장기화로 나프타 수급 차질이 빚어지면서 전남 여수산단 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공장이 잇따라 중단되고 있다. 지난 1일 여천NCC 나프타 가공 설비의 모습. 연합뉴스
석유화학산업 위기 속에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근로자들의 고용불안도 커지고 있다. 김종호 여천NCC 노조지회장은 “공장 가동을 중단한 후 희망퇴직까지 받는 기업이 있다”며 “여천NCC도 구조조정으로 타 기업들과의 합병이 이뤄질 경우 희망퇴직이나 명예퇴직 등 인원 감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했다.
지역 상권도 패닉에 빠졌다. 여수산단의 베드타운 역할을 해온 무선지구는 오랜 불황 속에 중동 사태까지 겹쳐 붕괴가 가속화되고 있다. 여수산단 발 경기 침체는 여수에서 가장 번화한 학동상권까지 타격을 주는 상황이다.
지난 7일 밤 찾은 무선지구는 거리 곳곳이 한산했다. 무선지구는 여수산단 근로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원룸·모텔과 유흥시설 등이 밀집한 곳이다. 상가 대부분의 간판불이 꺼진 상태였다. 셔터가 내려진 식당과 주점들 입구에는 ‘임대’, ‘매매’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지난 11일 전남 여수시 무선지구 중심 상권이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황희규 기자
노래방 업주 김모(58)씨는 “여수산단 손님(근로자)들이 모두 사라지면서 매출이 4~5년 전보다 5분의 1까지 떨어졌다”며 “(무선지구) 노래방 대부분이 사실상 개점휴업인 데다 폐업하는 가게도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명 식당과 술집 등이 밀집한 학동 먹거리 골목까지 상권 침체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날 오후 9시쯤 찾은 학동 먹거리는 일부 맛집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가게에 빈 테이블이 수두룩했다. 한때 고가의 권리금이 오갔던 일부 가게는 문을 닫은 채 ‘임대’와 ‘폐업’ 등의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학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60대)씨는 “여수산단이 불황에 빠진 후부터 손님이 확 줄더니 이제는 전쟁까지 터져 어려움이 크다”며 “지난해 말부터는 힘들게 버티기만 하는 상황이어서 장사를 계속해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전남 여수시 한 식당 내부가 점심시간에도 불구하고 손님이 한 명도 없이 빈 테이블만 놓여져 있다. 황희규 기자
여수 지역 자영업자들은 “당장 전쟁이 끝나도 경기가 바로 살아나긴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한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가 완전히 풀리더라도 원유 수급과 공장 가동이 곧바로 정상화되긴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글로벌 경기와 중동 사태 등의 상황을 봤을 때 석유화학 분야가 정상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한문선 여수상공회의소 회장은 “중국발 석유화학제품 공급 과잉에 중동 사태까지 더해져 여수산단이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며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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