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테라스서 클래식 들으며 가배 한잔…궁, 힙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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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대를 여행하는 듯한 ‘덕수궁 밤의 석조전’.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지난 16일 오후 땅거미가 짙은 서울 덕수궁. “황제 폐하의 귀빈들을 모시겠다”는 순검과 상궁, 근위대장의 안내를 받아 관람객들이 석조전에 도착했다. 1900년대 초 서구 신고전주의 양식 건물을 둘러보던 50대 부부가 연신 “운치 있다”고 감탄했다. 우아한 금실 무늬 한복을 차려입은 20대 여성은 “이직을 위해 쉬는 동안 나를 위한 힐링으로 프로그램을 예약했다”고 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공간을 엿본 뒤 2층 테라스석에서 실내악 연주와 함께 가배(커피의 옛말)와 다과를 즐기는 ‘덕수궁 밤의 석조전’은 예매권 추첨 경쟁이 137대 1에 이르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역사문화유산인 궁능(궁궐과 왕릉)과 종묘가 감성적 취향을 과시하는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지난해 궁능 및 종묘 방문객은 1781만4848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외국인은 약 4분의 1을 차지했다. 올해도 지난 19일까지 누적 방문객 407만6352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416만1558명)보다 13.1% 늘었다. 봄·가을마다 열리는 궁중문화축전과 경복궁·창덕궁 등 5대 궁궐 체험 행사는 아이돌 공연 못지않은 ‘피켓팅(피를 튀는 티켓팅)’으로 소문났다.

궁궐이 핫해진 이유는 실제로 볼거리가 늘었기 때문이다. 경복궁의 경우 1990년대 시작한 정비·복원 사업에 힘입어 36동이던 전각이 현재 148동으로 늘었다.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의 김철용 복원정비과장은 “하드웨어 측면에서 관람 동선이 커진 데다 왕실 부엌이던 소주방을 복원하면서 ‘경복궁 생과방’ 같은 행사도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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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달빛기행’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서울 종로구 창덕궁에서 참가자들이 청사초롱 형태의 휴대 조명을 들고 인정전을 관람하는 모습. 김경록 기자

2014년 시작된 궁중문화축전 뿐 아니라 ‘창덕궁 달빛기행’ 같은 활용 프로그램이 꾸준히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한양대 이훈 교수(관광학부)는 “궁궐은 멈춰 있는 공간이지만 콘텐트와 이벤트가 더해지면서 방문객들은 마치 살아 있는 역사를 체험하는 듯한 ‘실존적 진정성’을 느끼게 된다”고 설명했다.

소비의 중심이 물건에서 경험으로 이동하는 ‘경험 경제(Experience Economy)’ 강세 속에 이른바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 높은 소비라는 장점도 있다. ‘밤의 석조전’의 경우 국고 지원에 힘입어 1인당 3만5000원으로 경성시대 상류층 문화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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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별식을 즐기는 ‘경복궁 생과방’ 프로그램. [사진 국가유산진흥원]

교육과 엔터테인먼트가 결합된 ‘에듀테인먼트’ 효과도 낸다. 16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계기로 단종에 푹 빠진 이들이 영월 장릉으로 몰리는 현상이 대표적이다. 이에 맞춤한 특별 프로그램도 줄잇고 있다. 이달 27일부터 다음 달 3일까지 경복궁 생과방에서는 단종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한 궁중 별식 체험 ‘유주(幼主), 생과방의 봄’이 열린다. 조선왕릉길 여행프로그램 ‘왕릉팔(八)경’에도 단종 부부의 능과 종묘를 연계한 투어가 포함됐다. 이 같은 인기 속에 올해 축전의 경우 설화수·테라로사·농심 등 뷰티·식음 브랜드뿐 아니라 ‘밀리의 서재’ 같은 플랫폼 업체까지 협업에 가세했다.

김형우 한반도문화관광연구원장은 “활용이 보존이라는 선순환의 맥락에서 더 다채로운 이벤트로 관광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방문객이 늘수록 최근 경복궁 내 화재 사고 같은 위험도 커진다. 궁능유적본부의 안호 서비스기획과장은 “현실적으로 보존·관리가 가능한 틀 안에서 프로그램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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