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기적의 동화, 비극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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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폼으로 얼굴을 가린 채 좌절하는 레스터시티의 팻슨 다카. 10년 전 EPL 우승팀 레스터시티는 챔피언십(2부)에서도 밀려 리그1(3부)까지 추락했다. [AP=연합뉴스]
2016년 5월. 만년 꼴찌팀 레스터 시티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 우승했다. 축구 사상, 아니 세계 스포츠사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동화였다. 공장 노동자 출신 제이미 바디, 프랑스 빈민가의 무명 선수 리야드 마레즈, 3부 리그를 전전하던 은골로 캉테 등 ‘축구 미생’들이 거대 자본을 앞세운 공룡 구단들을 연파했다.
프리미어리그는 세계에서 가장 자본주의적인 리그다. 미국 프로 스포츠와 달리 팀 간 전력 평등을 위한 드래프트나 샐러리캡(연봉 상한제) 같은 인위적인 장치가 없다. 전통과 인기, 거대 시장을 점유한 명문 팀이 돈으로 재능 있는 선수를 싹쓸이해 더욱 막강한 ‘수퍼팀’이 되는 것을 방관, 혹은 장려하는 구조다. 나머지 팀들은 이들이 흘린 자투리 시장을 나눠 먹으며 연명할 수밖에 없다.
그 수퍼팀이 하나라면 운 좋게 무너뜨릴 수도 있겠지만, EPL에는 그런 골리앗이 너댓 개나 포진해 있다. 꼴찌 팀이 넘을 수 없는 벽 다섯 개를 차례로 허물고 정상에 서는 것은 확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창단 132년 만의 성과이자 우승 확률 5000분의 1을 뚫어낸 기적이었다. 당시 레스터 시티 주전 11명의 시장 가치 총합(약 405억 원)이 명문팀 스타 단 한 명의 몸값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언더독 드라마의 카타르시스를 완성했다. 세계적인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푸른색 유니폼 옆에서 ‘네순 도르마(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를 때, 전 세계 팬들의 가슴에는 낭만이라는 이름의 파도가 일었다.
2015~16시즌 EPL 우승 후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레스터 시티 선수들. [AFP=연합뉴스]
그러나 이 찬란했던 동화는 정확히 10년 만에 가장 추악한 형태의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에 한 방 먹인’ 레스터 시티를 무너뜨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경멸했던 그 ‘돈’이었다. 재정을 관리할 지능도, 절제력도 없었던 경영진은 주먹구구식 운영 실수를 연발했다.
22일(한국시간) 헐 시티와의 잉글랜드 챔피언십 44라운드에서 비겨 남은 두 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리그원 강등(22~24위)이 확정됐다. 챔피언십(2부)에 이어 리그원(3부)까지 2년 연속 강등이다.
영국 BBC는 이 참사를 ‘오만한 돈질(financial hubris)’이 부른 파멸이라 규정했다. 레스터 시티는 최근 3년 누적 적자가 1억500만 파운드(약 2080억 원)를 넘어서는 안 되는 수익성·지속가능성 규정(PSR)을 약 400억 원 가량 초과했다. 탐욕의 대가는 혹독했다. 승점 6점 감점이라는 족쇄를 찼고, 징계 발표와 항소가 이어지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최근 18경기에서 단 1승에 그치는 처참한 실력을 노출했다.
운영은 그야말로 파산 수준이었다. 유리 틸레만스 등 핵심 전력들과 재계약 협상을 벌이다 골든 타임을 놓쳤고, 단 한 푼의 이적료도 건지지 못한 채 이들을 자유계약(FA)으로 떠나보내는 촌극을 빚었다. 가디언은 “유망주를 키워 재정을 충당하던 전략이 무너지자 참혹한 청구서가 날아들었다”고 꼬집었다. 강등 직후에도 매출액의 116%를 인건비로 쏟아붓는 기형적 구조를 고치지 못했다. 우승 직후 1억 파운드를 들여 지은 유럽 최고 수준의 훈련장은 이제 몰락한 가문의 사치스러운 유산이자 ‘돈 먹는 하마’로 남게 됐다.
10년 전 레스터 시티가 써 내려간 동화의 끝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었다. 성공에 취해 시스템을 망각한 교만의 대가가 얼마나 섬뜩한지 보여주는, 축구사에서 가장 추악한 잔혹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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