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말레이시아의 탄생, 그리고 충격의 싱가포르 분리 [왕겅우 회고록-청년기(15)]
-
5회 연결
본문
Malaysia / 말레이시아의 탄생
미국 여행이 내 학계 경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마거릿의 예측은 옳았다. 그러나 내 활동 반경이 얼마나 빨리 넓혀지고 내 시간을 많이 쓰게 될지는 우리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몇 주일 후 예일대의 아서 라이트에게서 “유학자의 모습들” 학회에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하버드에서 한 풍도(馮道)에 관한 강연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풍도는 전쟁과 파괴의 시대를 살며 주군들을 충성으로 보좌한 기이할 정도로 모범적인 유학자였다. 그 자신이 유학자를 자처하고 동시대 사람들도 인정했는데, 왜 백년 후의 사람들은 그를 유가사상의 극악무도한 배신자로 매도했는지 이상했다.
열네 사람이 모여 닷새 동안 5세기에서 20세기 사이의 유학자 열한 명을 도마에 올려놓던 기억이 생생하다. 발표와 토론을 들으며 중국사에서 유가사상의 역할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에 눈을 뜨게 되었다. 중국학 연구자들이 나를 동료로 받아들여 준 것도 뜻밖이었지만, 더 뜻밖의 일은 그들 틈에서 내가 아주 편안했다는 사실이다.
1961년 1년간 록펠러재단 지원으로 소아스에서 지내라는 초청을 그 무렵에 받았다. 동남아시아 역사학자 세 사람이 런던에서 지내며 우리 지역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는 지원금이었다. 한 해 동안 방대한 명실록(明實錄), 특히 홍무제와 영락제의 시기에 집중하고 지냈다. 정화(鄭和)의 일곱 차례 항해에 매혹되었고, 정화가 찾아간 군주들과 명 황제 사이 관계의 성격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로부터 조공(朝貢)제도의 성격과 의미에 관한 논문이 몇 편 나왔고 영락제 이하 명 황제들과 말라카 군주들 사이의 특별한 관계도 다뤘다. 유럽인이 오기 전 중국과 동남아시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성과를 거둔 시간이었다.
말라야를 떠나 있으면서 말라야 민족주의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살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왕립중앙아시아학회의 초청 강연에서 “말라야 민족주의”를 발표했고, 학회지에 실렸다. 50년 전에 제기한 이 정의는 툰쿠 압둘 라만의 “대 말레이시아” 선언 이전의 “말라야”를 그리려 한 것이다. 그 강연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말라야 민족주의: “말라야”는 영국 지배기 이래 말레이반도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었고 독립(1957)을 전후해서도 “말라야연맹”(1946-48) “말라야연방”(1948-63)의 국호에 쓰이다가 1963년 “말레이시아”로 바꿨다. “말레이”가 종족과 언어, 문화를 가리키는 말인 반면 “말라야”는 지명의 의미에 한정해서 대개 쓰인 말이므로 “말라야 민족주의”는 모순이 담긴 표현이지만, 복잡한 종족 구성을 초월하는 대승적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의미에서 쓰인 말이다.
“이 단계에서 ‘말라야 민족주의’의 정의를 시도한다면 아마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레이 민족주의라는 과핵(果核)과 그를 둘러싼 말레이-중국-인도 통합성이라는 과육(果肉)입니다. 아마 많은 말레이 정치인들도 비-말레이 정치인들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관점일 것입니다. 말레이 지도자 중에는 말라야 민족주의를 말레이 민족주의와 동일시하고 ‘말라야’보다 ‘말레이’란 말만 무조건 쓰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말라야인’을 자처하는 중국인과 인도인 중에는 ‘말라야’가 ‘말레이’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라야 민족주의의 역동성과 집중력과 지도력은 말레이 지도층에게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중국인과 인도인 모두 이 말레이 지도층을 지지하면서도, 자기네 지도력의 주장과 권리를 포기한 일이 없습니다.”
1962년 초에 돌아온 나는 문학부 학부장을 맡았다. 2년 동안 두 차례(미국과 영국) 밖에 나가 있던 입장에서 내 몫의 행정 부담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그때 큰 일거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말레이 연구와 인도 연구의 뒤를 이어 중국 연구를 위한 학과를 만든다는 대학 당국의 결정이었다. 또 하나는 쪼그라들어 가는 대영제국의 다섯 개 정치조직이 말레이시아연방을 세우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대학에서는 중국학과 과장으로 케임브리지대학의 정더쿤(鄭德坤) 교수를 초빙하고 싶었으나 정 교수는 방문교수로 1년간만 오겠다고 했다. 학장인 내가 당분간 그 자리를 겸임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1963년 신입생 모집을 앞두고 새 교수진을 초빙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정 교수의 도움을 받으며 교과과정을 준비하고 교수진 채용에 나섰다.
두 번째 과제는 말레이시아 국가의 관념을 숙성시키는 일이었다. 영국 통치에서 풀려나는 하나의 정치조직을 넘어서는 새 국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정치 지도자들은 말라야 국민이 될 사람들에게 어떤 종류의 시민권이 가장 적합한 것일지 논의하고 있었다. 말레이인이 주도하는 협력체제에 중국인 집단과 인도인 집단이 참여하는 것이 권력 분할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주장과 종족의 차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맞서 왔다. 후자의 주장은 민생 문제의 해결과 빈부 격차의 해소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바람직한 장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취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종족 간 차이를 억지로 덮어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식민국가의 유산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러 가지 관료제와 봉건적 특권을 버무려놓은 식민국가들을 묶어 연방으로 만들면서 강력한 중앙 통제력의 확보가 관건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핵심은 여러 집단의 사람들이 자기 운명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해주는 민주적 권리의 이념에 있었다.
내 민주주의 경험은 빈약했다. 1960년 미국에 갔을 때 케네디와 닉슨 사이의 선거전을 보며 민주주의 운용에 지속적인 흥분과 절실한 긴장감이 곁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제 돌아보면 나는 민주주의를 독립에 반드시 따라오는 당연한 선물로 여겼다. 얼마나 운용하기 힘든 제도인지, 인민의 소망을 진실로 대변하기 위해 얼마나 강한 책임감이 필요한 것인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종족 중심 정당들에 대한 일종의 체질적 반감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나는 곧 깨달았다. 예상대로 각 종족의 단결을 내세운 3개 정당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들의 득표가 절반을 별로 넘지 않은 사실은 고무적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내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민주적이고 종족을 넘어서는 말라야를 건설하는 길을 찾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낙관적 생각을 가지고, 그 방향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교육에 종사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Producing A Survey / “건국 방략” 만들기
1961년 툰쿠 압둘 라만이 “대 말레이시아” 개념을 제안했다. 그때 마거릿과 나는 런던에 있었는데, 1962년 초 귀국 직전 보르네오섬 세 개 정치조직이 연방 참여 의사를 밝혔다는 소식에 놀랐다. “대 말레이시아”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학술적 문제가 아니라 “말레이시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새 진로가 어떻게 펼쳐질지 동료들도 나처럼 모두 어리둥절했다. 학부장이 된 후 이 새로운 국가의 소개서를 제공하기에 우리 학부가 적합한 곳이라 판단하고 이 국가의 성립을 뒷받침할 기본조건을 설명하는 논문집 편찬을 제안했다. 결국 27명이 참여해서 관계된 여러 정치조직에 관해 알려진 사실을 조사해 새로운 국가 건설에 공헌하기로 했다.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을 목표로 달려든 것은 1963년 8월 31일로 예정된 확장 연방의 출범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편집 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보르네오의 세 개 정치조직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참여자의 한 사람인 사라와크박물관의 톰 해리슨에게 보르네오 쪽을 살펴볼 수 있는 여행을 위한 조언을 청했다. 1963년 2월에 출발해 사라와크에서 3주, 브루네이에서 1주, 사바에서 2주를 지냈다.
정치적 상황을 살피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곳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었다. 실제로 말레이시아 가입에 관한 토론이 활발한 곳은 사라와크뿐이었다. 그곳에서는 지역 공산당이 형제당인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의 지원을 받아 영국 식민통치에 반란을 꾀하고 있었다. 최근의 반란에서 회복 중인 브루네이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사바에서는 통합에 찬성이지만 열성은 없는 관리들을 만났을 뿐이다.
이제 돌아보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 후 동말레이시아와 브루네이에 여러 번 갔는데, 그곳 주민들에게 연방 가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 이해가 부족했었다는 사실을 갈 때마다 깨닫곤 했다. 브루네이에 가보고도 그곳 술탄이 연방 가입을 거부하게 될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 책의 기고자들에게 큰 피해를 끼친 문제였다. 모두에게 원고를 돌려주고 브루네이에 관한 모든 서술을 수정하도록 부탁해야 했다. 도표와 도판 몇 개도 새로 만들어야 했다. 출판사 사람들은 참을성 있게 응해주었으나 간행이 1년 가까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책에 매달려 있던 15개월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고, 다시는 시사적 정치 문제에 그렇게 달려들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63년 9월 연방 출범 때까지 미뤄뒀던 서문에서 나는 경축 분위기에 휩쓸린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첫 보르네오 여행에서 돌아올 때 실제로 느꼈던 것에 비해 낙관적인 관점을 그 서문에 적었다. 이런 대목이 그렇다.
“희망에 찬 동남아시아 새 국가의 전체적 모습을 이 책에 담긴 연구들이 충분히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 말레이시아의 새 주(州)들은 다종족 민족주의의 발전에 각자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다. 싱가포르는 중국인이 압도적 다수인 도시로서 범종족적 정체성을 발전시킬 충분한 역량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제 이 정체성의 가치를 국내 다른 곳에서도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사라와크와 사바에는 아직도 어려움이 남아있으나 자기네 식의 범종족적 정체성을 키워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정체성이 반도부에서 개발된 정체성과 쉽게 어울릴 수 있을지 여부는 새 국가 지도자들의 지혜에 달려 있다.”
말레이시아 통합에 반대하는 수카르노 대통령의 콘프론타시(Konfrontasi, 대결) 정책은 곧 폭력 단계로 넘어갔다. 말레이시아는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서둘러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새 국가는 모든 곳의 뉴스에 나왔고 덕분에 우리 책도 큰 주목을 받았다. 종족간 관계의 긴장을 증폭시킨 몇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일련의 경제적-행정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쿠알라룸푸르(KL)와 싱가포르 사이의 공식적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책에 대한 회의적 서평이 나오는 중에도 나는 서문의 결론부에 담은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개념은 동남아시아에 민주적 제도의 항구적 기지를 만들려는 정치적인 결정이다. 이 개념은 당연히 국제공산주의의 도전을 받았다. 의회민주주의가 실패한 인도네시아 또한 반대에 나섰다. 말레이시아에게는 아직 다국가체제와 다원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과제가 있고, 이것이 쉽지 않은 과제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 세계 민주국가들이 말레이시아의 성공을 바라며 동남아시아에서 그 역사적 역할을 인식하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근대사의 가장 고귀한 이념들을 시행할 기대를 받고 있다. 자유의 이념, 민주적 대의정치의 이념, 그리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념이다. 아낄 가치가 있는 이념들이다.”
이제 돌아보면 나는 1949년 이래 말라야 시민으로 내 자리를 찾기 위해 열심이었고, 1963년의 이 글은 이 나라의 새 모습에 대한 내 믿음을 확인한 것이었다. 싱가포르와 국가 중심부 사이의 관계를 놓고 구체적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희망적 견해를 내놓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여러 해에 걸친 논쟁과 대결의 가장 바람직한 결과가 싱가포르를 품은 말레이시아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나온 견해였다. 이 책이 나온 불과 1년 후인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지도자들의 싱가포르 분리 결정 발표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사라와크와 사바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확장된 말레이시아에 싱가포르도 함께 들어갈 것을 기대하던 그들도 나 못지않게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싱가포르 분리: 말레이반도의 영국 지배 지역은 여러 개 식민지와 보호국(술탄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구조와 성격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나 “말라야”로 통칭되었다. 차이가 가장 큰 곳이 싱가포르였고, 말라야연방의 독립(1957) 후에도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1961년 5월 말라야연방의 툰쿠 수상은 싱가포르와 함께 종래 말라야의 범주로 인식되지 않던 보르네오섬 북부의 영국 지배지 사라와크, 사바와 브루네이를 연방에 합치는 “대 말레이시아” 방략을 발표했고, 2년 후 브루네이만을 빼고 통합된 말레이시아가 출범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특수한 조건이 새 국가체제에 맞지 않아 많은 문제가 일어났고, (대표적인 예가 1964년 7월 싱가포르의 인종폭동) 싱가포르 지도자들과 국가 지도부 간의 협의를 거쳐 1965년 8월 싱가포르의 분리가 말레이시아 의회에서 결정되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