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21년 만에 EPL 한국인 전멸 위기, 낭만 잃고 시스템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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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며 시작된 한국인 프리미어리그의 역사가 21년 만에 끊어질 위기에 처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1일, 셀허스트 파크에서 들려온 크리스털 팰리스와 웨스트햄의 0-0 무승부 소식은 애타는 심정으로 이 경기를 지켜보던 울버햄프턴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잔여 5경기를 모두 이겨도 강등권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울버햄프턴의 운명은 주축 공격수로 활약하던 황희찬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커리어에도 커다란 물음표를 던졌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지난 2005년, 박지성과 이영표가 각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토트텀 홋스퍼에 입단하며 시작한 한국 축구의 ‘EPL 대항해 시대’가 막을 내릴 위기다. 지난 세월 동안 총 15명의 선수가 EPL 무대를 밟으며 역사와 전통을 이어왔지만, 이제 명맥이 끊어질 상황에 처했다.
토트넘 홋스퍼 소속으로 현재 코번트리 시티에 임대 중인 양민혁을 비롯해 브렌트퍼드 소속의 김지수(현재 카이저슬라우테른), 브라이턴 소속의 윤도영(현재 도르드레흐트), 뉴캐슬 산하 21세 이하 팀에서 뛰고 있는 박승수 등 향후 여러 미래 자원들이 있지만, 현재 팀 내 입지 등을 고려할 때 이 선수들이 당장 다음 시즌에 EPL의 호출을 받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EPL에 한국 선수 기근 현상이 발생한 건 박지성과 손흥민(LAFC)으로 이끌어 온 ‘대한민국 최고 선수 EPL 진출 흐름’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다. 축구대표팀의 최고 레벨 선수들이 EPL 진출을 지향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한동안 이어졌지만, 최근엔 다르다. 현재 대표팀에서 경기력 기준 최고로 평가 받는 김민재(바이에른 뮌헨)와 이강인(파리생제르맹)은 앞서 EPL 구단들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보다 리그 레벨이 단계 낮은 독일과 프랑스의 우승권 팀을 선택했다. ‘어디서 뛰느냐’보다 우승 가능성과 출전 시간 등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적 트렌드가 자리 잡았다.
EPL 구단들의 선수 영입 정책이 달라진 것도 한 몫 했다. 과거에 비해 선수 몸값이 폭등한 시장 환경에서 대부분의 EPL 구단들은 K리그를 포함한 아시아 출신 선수는 유망주 위주로, 유럽 주변 나라와 남미 등에서는 검증된 선수 위주로 데려오는 기조가 고착화 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양민혁, 김지수, 윤도영 등 가능성 있는 자원들이 EPL의 부름을 받고도 1군 로스터 진입에 애를 먹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K리그에서 기량과 성장 가능성을 인정받은 선수들이 당장 주전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무대는 챔피언십(잉글랜드 2부) 정도다.
우리가 ‘프리미어리거 전멸’을 걱정할 때 일본은 미토마 카오루(브라이턴), 엔도 와타루(리버풀), 카마다 다이치(크리스털 팰리스), 다나카 아오(리즈 유나이티드) 등 4명의 주전급 선수들이 안정적인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모두 J리그에서 곧장 EPL로 향하지 않고 벨기에, 독일 등 유럽 내 여타 리그에서 유럽 축구의 템포와 피지컬에 적응을 마쳤다는 공통점이 있다. 에인트호번을 거쳐 맨유에 정착한 박지성, 함부르크와 레버쿠젠에서 핵심 선수로 자리매김한 뒤 토트넘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손흥민 등의 성공방정식으로 우리보다 일본이 더욱 재미를 보는 상황이다.
현재로선 소속팀 강등으로 이적 가능성이 열린 황희찬, 최근 EPL 구단들과의 협상설이 나오는 오현규(베시크타시) 등이 한국인 프리미어리그의 명맥을 이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자원들이다. 다가오는 북중미월드컵이 이들의 경쟁력을 입증하는 쇼케이스 역할을 할 수 있다.
두 선수의 거취와 상관없이 한국 축구는 치열한 자기 성찰을 시작해야 한다. 간간히 등장하는 ‘별종급 천재’들의 활약에 의존하는 시대는 끝났다. 유망주들이 유럽 중소리그를 거쳐 체계적으로 성장하는 로드맵을 완성하지 못 하면 2026년에 맞이한 ‘한국인 프리미어리그 멸종 위기’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다.
축구는 전 세계가 함께 즐기는 스포츠지만, 보편화 된 만큼 비정한 종목이기도 하다. 어제의 영광은 오늘의 강등을 막아주지 못 하고, 이름값은 경기장에서 출전 시간을 보장해 주지 못 한다. 21년 전 박지성이 활짝 열어 젖힌 그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한국 축구는 ‘EPL이 요구하는 글로벌 스탠더드’가 무엇인지, 그 엄격한 기준을 어떻게 충족할 지 꾸준히 자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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