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러너는 쏟아지는데…마라토너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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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인구는 10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마라톤 동호인이 날로 늘어나는 반면 한국 엘리트 선수의 기록은 뒷걸음질 치고 있다. [중앙포토]
사바스티안 사웨(케냐)가 지난 26일 런던마라톤에서 1시간59분30초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인류 최초의 공식 서브2다.
같은 날, 지구 반대편에서 황영조(56)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팀 감독은 그 기록을 보며 한국 마라톤에 대해 “사실상 속수무책이다”라고 했다.
속수무책 한국 마라톤의 진짜 모습은 두 달 전 이미 드러났다. 지난 2월 대구마라톤 국내 남자 엘리트 1위 기록은 2시간20분43초였다. 함께 출발한 국제부 여자 1위 케냐 선수는 2시간19분35초. 마라톤이 직업인 한국 남자 선수 중 가장 빠른 기록이 외국 여자 선수보다 느렸다. 국제부 여자 2위 에티오피아 선수도 한국 남자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을 딴 1992년, 이봉주가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2001년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한국 남자 마라톤 기록은 이봉주가 2000년 세운 2시간7분20초다. 26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 경신은커녕 2010년 이후 2시간10분 이내로 뛴 선수가 지영준(2시간9분31초)과 오주한(2시간8분42초) 둘뿐이다. 2024 파리올림픽에는 기준기록(2시간8분10초)에 미달해 남녀 단 한 명도 출전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보유국의 현주소다.
아마추어가 다 따라왔다. 지난 3월 서울마라톤 마스터스 부문 우승자 김지호 씨의 기록은 2시간17분12초였다. 한국 남자 전체 6위에 해당한다. 이 대회 엘리트 선수 34명 중 29명이 마스터스 우승자보다 기록이 뒤졌다. 황영조 감독이 “동호인에 따라잡히는 경우도 있다”고 했는데, 요즘은 흔한 일이다.
출산율을 얘기하지만 문제는 저변이 아니다. 요즘 한국은 ‘마라톤 공화국’이라 해도 무방하다. 전국에서 매년 수백 개의 대회가 열리고, 풀코스 참가자가 1만 명을 넘는 대회도 흔하다. 달리기를 즐기는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런데 엘리트만 역주행이다.
구조가 문제다. 시즌마다 상위권 선수들이 ‘A 대회는 누구, B 대회는 누구’ 식으로 교통정리하듯 출전 대회를 나눠 정한다. 국내 상위 기록 보유자들이 한 레이스에서 맞붙는 장면 자체가 드물다. 긴장감이 사라지고 기록 향상의 동기도 없어진다. 대회마다 1·2위 선수가 바뀌지만 경쟁으로 새 얼굴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우승 나눠먹기만 반복된다.
전국체전과 국내 대회 입상이 실업팀 입단과 연봉 계약을 좌우하는 까닭에 기록은 처음부터 목표가 아니다. 실업팀 대부분이 지자체 소속이다 보니 기록보다 전국체전 메달 수에 예산이 따라붙는다. 한국 기록을 세 번 경신한 김완기 전 삼척시청 감독은 “선수는 부족한데 실업팀은 늘어나 선수가 아쉬울 게 없어 감독이 강하게 훈련시키기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했다.
케냐 이텐에는 약 2000명의 전업 마라토너가 매일 아침 흙길을 달린다. 아무도 “왜 뛰느냐”고 묻지 않는다. 오히려 “왜 안 뛰느냐”고 묻는다. 케냐 코치 버나드 오우마는 “이웃이 달려서 우승하는 걸 보면, 나도 달려서 이기고 싶어진다”고 했다. 달리기는 그들에게 빈곤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사다리다.
한때 아시아에서 경쟁하던 일본은 한국과 다른 세상에 있다. 최근 5년 새 2시간4분대 기록이 나왔다. 일본 선수들은 배고프지는 않지만 달리기를 사랑한다. 이텐의 흙길과는 다른 이유지만 열정 만큼은 다르지 않다. 새벽에 일어나 훈련하고, 더 빠른 기록을 향해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이 선수로서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배고파서 뛰는 개발도상국형 케냐, 좋아서 뛰는 선진국형 일본. 한국 엘리트는 그 어느 쪽도 아닌 공무원형이다. ‘육상직 공무원’이라는 조롱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월급과 전국체전 메달이 보장되는 한 굳이 한계를 밀어붙일 이유가 없다. 절박함도 없고 열정도 식어 진화를 멈춘 마라토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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