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찰스3세 “80년 질서 무시 안돼”…트럼프가 흔든 ‘대서양 동맹’ 가치 역설

본문

bte3a5418691e64b97841bb45c5caaa216.jpg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상ㆍ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은 28일(현지시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250년 전의 격렬한 분열 속에서 우리는 우정을 다져 왔고,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대한 동맹 중 하나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찰스 3세 국왕은 이날 미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한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영국과 미국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화해와 갱신, 그리고 놀라운 협력의 이야기”라며 이같이 말했다.

찰스 3세는 특히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은 어느 한 국가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다”며 “이 예측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우리의 동맹은 과거의 성과에 안주하거나 기초 원칙들이 저절로 지속될 거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80여년간 서방 세계가 구축한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이 지난해 1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균열 양상을 보이는 데 대한 우려와 경고의 메시지로 풀이된다. 찰스 3세는 “지난 80년 동안 우리를 지탱해 온 모든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찰스 3세는 “수 세기에 걸쳐 양국이 구축해 온 진정 독보적인 이 동맹은 헨리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가 말한, 케네디(전 미 대통령)의 ‘비상하는 비전’, 즉 유럽과 미국이라는 두 기둥에 기반한 대서양 파트너십의 일부”라며 “저는 그 파트너십이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은 냉전 시기 서방 진영 결속의 핵심 논리로 ‘대서양 파트너십’ 구상을 제시했고,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이를 현실주의 외교로 구현한 인물로 평가된다. 찰스 3세는 이 둘을 불러내 국제질서가 직면한 불안정성과 위기 속에 영·미 동맹의 전략적 필요성이 오히려 강화되고 있음을 부각한 것이다.

“9·11 테러 때 함께 부름에 응답”

찰스 3세는 미국의 이란 전쟁 과정에서 영·미 관계가 급속히 냉각된 상황임을 염두에 둔 듯 양국이 군사적으로 끈끈하게 협력해 온 역사를 들어 동맹 강화를 역설했다. 그는 올해 25주년을 맞은 9·11 테러를 들어 “9·11 직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사상 처음으로 제5조를 발동하고 유엔 안보리가 테러에 맞서 단결했을 때 우리는 함께 그 부름에 응답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국민들은 지난 1세기 넘게 두 차례의 세계대전, 냉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우리의 공동 안보를 규정해 온 수많은 순간들을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해 왔다”고 부연했다. “영국은 냉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지속적인 국방비 증액을 약속했다”고도 했다.

나토 5조는 ‘동맹 집단방위’를 담은 핵심 조항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맞서 항행 안전 확보를 위한 군사작전에 동참해 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영국을 비롯한 나토 주요 회원국들이 사실상 거절하자 “기억해 두겠다”면서 여러 차례 불만을 노골적으로 쏟아내 왔다.

bt1038a5630ddfc1d12f651cc7542e7c97.jpg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상ㆍ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위해 연단에 오르자 의원들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다. AFP=연합뉴스

찰스 3세 국왕의 이번 미국 국빈 방문은 이처럼 영·미 양국 간에 껄끄러운 냉기류가 흐른 가운데 이뤄진 것이다. 3박 4일간 펼쳐질 영국의 ‘왕실 외교’가 양국 간 긴장 해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가 최대 관심사였는데, 찰스 3세는 의회 연설을 통해 양국 동맹을 비롯한 대서양 파트너십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지금이야말로 동맹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라고 뼈 있는 말을 한 셈이다.

“대서양~북극 美·동맹 헌신, 나토 핵심”

찰스 3세는 “대서양의 심연에서부터 재앙적으로 녹아내리는 북극의 빙하에 이르기까지 미군과 동맹국들의 헌신·전문성은 나토의 핵심을 이룬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국이 F-35 전투기를 공동 제조하고, 미국·영국·호주 3국 안보 협의체인 오커스(AUKUS) 체제에서 호주의 원자력추진 잠수함 역량 강화에 합의한 점 등을 들어 “우리가 이런 놀라운 과업을 함께 수행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에 의한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더 큰 공동의 회복탄력성을 구축해 미래 세대에 걸쳐 우리 국민을 더욱 안전하게 만들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양국 간 경제 협력도 부각했다. 그는 핵융합과 양자 컴퓨팅, 인공지능(AI)·신약 개발 분야 협력을 거론하며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연간 4300억 달러 규모의 무역, 거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1조7000억 달러 규모의 상호 투자, 그리고 대서양 양측 경제 전반에 걸쳐 유지되는 수백만 개의 일자리를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

bt1d58a9b6d748aff44614a8dacf92ea45.jpg

미국을 국빈 방문 중인 찰스 3세 영국 국왕이 28일(현지시간) 워싱턴 DC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만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영·미, 언어 빼고 다 공유” 유머 던져 폭소

찰스 3세는 양국 간 국경이 그어지기 훨씬 전 스코틀랜드와 미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은 하나였다는 점을 들며 “앞으로의 250년을 내다보며 우리는 가장 소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자산인 자연을 보호해야 할 공동의 책임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했다.

찰스 3세는 이날 약 31분간 이어진 연설 중간중간 유머와 위트를 섞어가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이끌기도 했다. 그는 연설 초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듯 오늘날 우리는 언어를 빼고는 미국과 정말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 객석에서 폭소가 터졌다.

영국과 미국은 민주주의, 가치관, 문화 등 거의 모든 면을 공유하지만 결정적으로 언어가 다르다는 얘기였다. 사실 두 나라는 영어라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일부 영국인은 미국식 발음과 철자 등을 비꼬며 자신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찰스 3세 국왕이 “양국은 말만 빼고 다 똑같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냉소적 유머를 인용해 양국 간 깊은 동질감을 우회적으로 세련되게 표현한 것이다.

bt60cc44910f1294a56f588be1fb983aa9.jpg

찰스 3세 영국 국왕(왼쪽)이 28일(현지시간)이 미국 워싱턴 DC 연방 의회 의사당에서 상ㆍ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오른 뒤 JD 밴스 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밴스 부통령 옆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은 박수를 치며 찰스 3세 국왕을 환영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암살미수 사건 두고 “폭력 결코 성공 못해”

찰스 3세는 지난 25일 백악관 출입기자협회 연례 만찬 행사에서 발생한 트럼프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해서는 “단호한 결의로 말씀드리건대, 그러한 폭력행위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찰스 3세 국왕 연설은 미 동부시간 기준 오후 3시 2분쯤 시작됐는데, 이는 영국 시간으로는 같은 날 오후 8시 2분에 해당한다. 연설은 미국과 영국 주요 방송사를 통해 생중계됐다. 찰스 3세 국왕 즉위 이후 미국 국빈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며, 영국 국왕의 미 의회 연설은 1991년 찰스 3세의 모친인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이후 35년 만이다.

연설에는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을 비롯한 500여 명의 미 연방 상·하원 의원은 물론 JD 밴스 부통령,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 주요 각료가 대거 참석해 경청하며 여러 차례 기립박수를 보냈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6,089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