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시한부 아빠에 불륜 엄마…“고아 됐으면” 11살 소녀의 위험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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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하거나, 고아가 됐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작문을 쓰는 소녀 후키(스즈키 유이).

영화 '르누아르' 하야카와 치에 감독 인터뷰

담임 선생님이 어머니 우마코(이시다 히카리)와의 면담에서 우려를 전달할 만큼 독특한 감수성을 지녔다. 후키가 처한 상황을 보면, 11살 소녀가 왜 그런 위험한 상상을 하는지 납득이 간다.

직장인 아버지 케이지(릴리 프랭키)는 말기 암 환자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남편 병수발 만으로도 벅찬 어머니 우타코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로 한직으로 밀려나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

상담사와 불륜에 빠진 엄마는 효과도 검증되지 않은 비싼 약을 사는 남편이 못마땅하고, 남편 몰래 장례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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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이런 환경 속에서도 후키는 영어 회화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며 꿋꿋이 자신의 세계를 지켜나간다. 폰팅에 접속해 어른들의 은밀한 세계를 엿보는 위험한 일탈까지 감행한다.

영화 ‘르누아르’(22일 개봉)는 돌봄의 부재 속에서 성장통을 겪는 소녀 후키의 위태롭고도 뜨거운 여름을 그린 작품이다. ‘플랜 75’(2024)에서 초고령 사회 일본의 근 미래를 암울하게 그려냈던 하야카와 치에(50)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이다.

그는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 감독과 함께 일본 영화계의 차세대 감독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회 비판적 메시지가 강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은 1980년대 후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비극과 소녀의 성장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지난해 열린 제 78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영화엔 어린 시절 아버지의 투병을 지켜본 감독의 경험이 녹아 있다. 전작에 이어 또 다시 죽음이란 소재로 서사를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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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 사진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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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를 연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왼쪽)과 11살 소녀 후키를 연기한 배우 스즈키 유이. 사진 오드

24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난 하야카와 감독은 “암 투병하던 아버지를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 때문에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내 안에 자리 잡은 것 같다”면서 “존엄을 지키지 못한 채 죽는 인간의 모습을 후키의 시선에서 담아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주제를 말로 설명할 수 있는 ‘플랜 75’와 달리,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성장하는 소녀의 시선으로 어른의 세계를 바라본다는 점에서 영화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이사’(1993)와 닮아 있다. 하야카와 감독은 “10대 때 극장에서 ‘이사’를 보고 어린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꼭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며 “작업하면서 ‘이사’를 항상 생각했고 오마주도 많이 담았다”고 말했다.

영화는 후키 뿐 아니라 끝까지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아버지 케이지, 흔들리면서도 자신과 가정을 지켜내려 하는 어머니 우타코의 내면까지 섬세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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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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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하야카와 감독은 “가족 바깥에서 각자의 구원을 찾는 가족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면서 “아버지가 암 치료제를 간절히 원했다면, 후키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을, 어머니는 괴로운 마음을 치유해줄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후키는 어머니가 불륜에 빠지는 걸 알게 되고, 문병 온 회사 동료들이 내뱉는 아버지에 대한 험담도 듣게 된다. 하지만 후키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하야카와 감독은 “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 역시 완벽한 어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며 “그 순간, 아이는 어른의 세계에 한 발 더 다가가고 성장해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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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후키는 폰팅을 통해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남자를 알게 되고, 그와의 만남은 소녀의 내면에 큰 상처를 남긴다. 하야카와 감독은 “후키 또래의 소녀들은 성적 대상이 되는 위험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다”며 “남자의 집에서 겪는 경험을 통해 기쁨과 불안, 기대와 상처가 복잡하게 뒤섞인 감정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했다.

후키가 탐구해가는 어른들의 세계는 낯설면서 불완전하다. 결핍 때문에 내면이 불안정하거나, 이해 못할 욕망에 사로잡힌 어른 답지 않은 어른 투성이다. 이를 통해 후키는 뭘 깨달았을까.

“후키가 아버지의 투병 등 여러 경험을 통해 타인의 슬픔, 그리고 자신의 슬픔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잘 성장해갈 거라 믿어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란 생각에 후반에 외국인들과의 선상 파티라는 판타지 장면을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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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르누아르'는 아버지의 암 투병, 어머니의 외도 속에서 홀로 세상을 알아가며 성장해가는 11살 소녀 후키의 이야기다. 사진 오드

프랑스 인상파 화가의 이름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 하야카와 감독은 “서양 명화 복제품을 집에 걸어두며 만족감을 느끼던 80년대 일본 사람들의 소박한 열망에 대한 향수를 담았다”면서 “‘르누아르’는 작은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윤곽이 드러나는 인상파 그림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차기작에 대해선 “이번 영화처럼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의 작품이 될 것”이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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