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뜯는 소리만 들어도 다르다…덕수궁 복원에 쓰인 한지 정체 [스튜디오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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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군 소양면의 대승한지마을 작업장은 한지를 뜨는 ‘물질’ 소리로 가득했다. 55년째 한지 제조 외길을 걸어온 김한섭 장인의 손놀림이 분주하게 이어질 때마다 대나무 발 위에는 뽀얀 '초지(草紙)'가 차곡차곡 쌓였다. “쓱쓱, 싹싹.”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는 물질 소리는 전통의 맥을 잇는 고귀한 선율처럼 느껴졌다.
전북 완주군 대승한지마을 한지제조소에서 김한섭 장인이 삶은 닥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다.
닥나무 껍질의 겉껍질인 피닥을 벗겨내고 흰 속껍질인 ‘백닥’만 남겨야 한다.
최근 전통 한지가 문화재 보수 현장에서 그 가치를 새롭게 인정받고 있다. 올해 덕수궁 보수 공사에 이곳 대승한지마을에서 만든 한지가 사용됐다. 이 한지는 매년 인근 농가의 닥나무를 직접 매입해 원료로 사용하는데, 오랜 세월 이어온 장인의 기술과 국산 원료가 만나 결실을 맺은 100% 국산 전통 수제 한지다.
한지의 재료가 되는 백닥.
삶은 백닥을 물에 담가 잿물과 티를 제거해야 맑고 투명한 한지를 만들 수 있다.
닥죽(왼쪽)에 일정한 배합으로 물을 섞으면 초지를 만드는 닥물(오른쪽)이 완성된다.
한지의 주원료인 닥나무는 섬유가 길고 질겨 종이 원료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겨울철 채취한 닥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백닥을 만든 뒤 잿물 처리와 표백, 불순물인 ‘티’를 제거하는 고된 과정을 거쳐 순수 섬유만 남긴다. 이후 섬유를 곱게 풀어 만든 ‘닥물’을 대나무 발틀로 여러 차례 떠올리는 ‘물질’을 통해 한 장의 초지를 만든다. 초지는 100번의 손길이 필요하다 하여 '백지'로도 불린다. 이어 초지를 건조대에 붙여 말리는 건조 과정을 거친 뒤 표면을 고르게 손질하고 재단하면 질기고 통기성이 뛰어난 전통 한지로 완성된다.
김한섭 장인이 쌍발뜨기 기법으로 발틀에 초지를 뜨고 있다.
김한섭 장인이 쌍발뜨기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김한섭 장인이 쌍발뜨기로 한지를 만들고 있다.
김한섭 장인은 일합지를 만들 때도 닥물의 양을 미세하게 조절해 한지의 두께를 다양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
그는 발에 입힌 초지에서 미세한 티와 불순물을 찾아내기 위해 매번 집중력을 발휘한다.
작업 현장에서 만난 김한섭 장인은 전통 기법인 외발뜨기와 개량 기법인 쌍발뜨기를 번갈아 선보이며 정성을 쏟았다. 그는 “물질을 할 때 방향을 위아래, 좌우로 번갈아 움직여야 섬유가 격자 형태로 얽혀 더욱 질겨진다”며 “이렇게 탄생한 한지는 통풍이 잘될 뿐만 아니라 내구성도 매우 뛰어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반적인 작업보다 많은 네 차례의 물질 과정을 거쳐 섬유의 결합력을 높였다.
김한섭 장인이 발틀에 붙은 초지에 ‘벼개’를 덧대고 있다. 벼개는 종이 섬유가 고르게 퍼지도록 돕고 물 빠짐을 조절해 종이 두께를 균일하게 한다. 건조 후에는 완성된 종이가 발틀에서 잘 떨어지도록 하는 역할도 한다.
발은 1㎜ 두께로 쪼갠 대나무를 촘촘히 엮어 만든 틀이다. 틈 사이로 물은 빠져나가고 섬유만 남아 초지가 형성되도록 돕는다.
홍덕순씨가 건조대에서 한지를 말리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건조 방식을 사용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자칫 곰팡이가 생길 수 있어 현재는 건조대를 활용하고 있다. 품질에는 차이가 없다.
홍덕순씨가 남편 김한섭 장인이 만든 초지를 떼어내고 있다.
홍씨는 건조대에서 한지를 떼어낼 때 나는 소리만 들어도 한지의 품질을 가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덕수궁 복원에 쓰인 한지는 벽지용 ‘이합지’다. 뜨는 횟수와 두께에 따라 나뉘는 한지 중에서도 내구성과 통기성이 가장 뛰어난 이합지는 전통 건축물 유지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재료의 전통성과 품질이 무엇보다 중요한 문화재 복원 현장에서 수십 년 경력 장인의 손을 거친 한지가 선택된 이유다.
김한섭 장인과 부인 홍덕순씨. 경력으로만 보면 홍씨가 한지와 함께 한 세월은 남편보다 길다.
김한섭 장인은 “전통 방식으로 만든 한지가 궁궐 보수에 쓰인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면서도 “이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후계자 양성과 사회적인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김한섭 장인이 완성된 한지를 확인하고 있다.
장인의 한지는 섬유 조직이 치밀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데다 통기성과 흡수성도 좋아 창호지와 문화재 보수용 한지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대승한지마을은 단순히 생산에 머물지 않고 전통 한지의 가치 확산에도 앞장서고 있다. 전통 한지 생산과 더불어 체험, 전시, 한옥스테이 운영은 물론 한지 수출까지 추진하며 지역 문화와 전통 산업 활성화에 힘을 쏟고 있다. 전통과 관광, 산업을 연계해 한지의 판로를 넓히려는 마을의 노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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