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2026년 로에베 공예상, 한국 작가 박종진 품에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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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로에베 재단 공예상(LOEWE FOUNDATION Craft Prize)의 우승자로 한국 도예가 박종진 작가가 선정됐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스페인 럭셔리 브랜드 로에베의 문화재단이 2016년 시작한 국제 공예상이다. 그간 ‘공예는 로에베의 본질’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바탕으로 현대 공예의 기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가능성을 함께 조명해왔다.
올해는 전 세계 133개 국가 및 지역에서 5100여 점의 작품이 접수됐고, 그중 30명이 최종 후보로 선정됐다. 특히 조수현·이종인·이소명·박지은·박종진·성코코 등 한국 작가 6명이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전체 후보의 20%를 차지하며 한국 공예의 저력을 보여줬다.

12일 싱가포르서 로에베 공예상 시상식 #박종진,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 우승 #최종 후보 30명 중 한국 작가만 6명 #“연약함과 힘 공존한 작품…이견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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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드 우승작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왼쪽)’과 박종진 작가. 사진 로에베


전통 기법 연결한 12년 공예 실험
“2026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드 우승자, 한국 작가 박종진.”
지난 5월 12일 오후 7시, 싱가포르 국립미술관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박종진 작가의 이름이 호명됐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작가와 큐레이터, 공예·디자인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종이와 도자를 결합한 그의 작품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Strata of Illusion, 착각의 층위)‘가 올해의 수상작으로 발표됐다.
올해 심사위원으로 처음 참여한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잭 맥콜로와 라자로 에르난데스는 “자기와 종이가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를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며 “색감, 기념비적인 형태, 복잡성이 인상적이었고,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과 강렬한 힘이 공존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수천 겹의 종이를 흙물에 적셔 쌓은 뒤 구워내고, 종이는 타서 사라진 뒤 자기만 남는 과정이 놀라웠다. 그것이 바로 공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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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진,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 도자기, 종이, 스테인, 유약, 750 x 450 x 560 mm, 2025년

작가 이름, 출신 국가 등 정보를 가리고 작품만으로 진행한 첫 비밀 투표에서도 박 작가의 작품은 심사위원 14명 중 12명의 지지를 얻었다. 심사를 맡은 조민석 건축가는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종이에 백자 유약 발라 구워
박종진 작가는 도예가이자 서울여자대학교 조교수다. 국민대에서 도예를 전공했고, 영국 카디프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세라믹 분야 석사를 마쳤다. 그는 전통 도예의 기물 개념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종이와 흙이라는 서로 다른 물성을 결합해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다. ‘디자인 마이애미’ ‘PAD 런던 아트+디자인’ ‘이머지 싱가포르’ ‘콜렉트’ 등 국제 전시에 참여했으며, 2024년 여주 경기도자비엔날레 국제공모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최근에는 럭셔리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전통 제작 방식과 현대 디자인, 기술을 연결하는 작업도 이어가고 있다.
이번 수상작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은 도자기와 종이, 스테인, 유약으로 완성한 대형 기물 작이다. 작가는 키친타월에 색을 입힌 백자 슬립, 즉 흙물을 바르고 이를 겹겹이 쌓은 뒤 고온에서 소성한다. 가마 안에서 종이는 모두 타 사라지고, 종이가 머금었던 흙의 얇은 결만 도자기로 남는다. 그 결과 작품 표면에는 종이 더미처럼 보이는 층위와 마블링이 생긴다.
박 작가는 이 과정에서 도자기는 반드시 형태와 물성이 균일하고 단단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소성 중 무너지거나 일그러지는 변형까지 작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번 작품은 제작 과정에서 그의 예상보다 크게 무너졌지만, 작가는 오히려 그 형태에서 또 다른 미학을 발견했다. 제목을 기존의 ‘아티스틱 스트라텀(Artistic Stratum)’ 대신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으로 바꾼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음은 박 작가와의 일문일답.

-독특한 작업 방식이다. 어떻게 시작했나.
“한국에서 전통 도자 기법을 배운 뒤, 영국 유학 중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접근을 시작했다. 당시 익숙한 세라믹에서 조금 떨어져 보려 했고, 가장 흔하고 싸고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종이로 실험을 시작했다. 재활용하려고 쌓아놨던 종이의 모습을 보고, 한 달간 고군분투한 시간이 그 안에 압축돼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에너지를 표현하면 감정의 기록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와 흙을 결합하는 방식은 어떻게 완성됐나.
“종이 위에 백자 슬립을 바르고 겹겹이 쌓은 뒤 구워봤다. 가마에서 종이는 타 없어지고 도자만 남았는데, 종이와 같은 결이 그대로 나왔다. 그 실험을 바탕으로 기물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종이의 양과 작품의 크기를 키워가며 12년 정도 이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초창기에는 단면적인 레이어를 쌓는 데 집중했다면, 지금은 서로 다른 성질의 조각을 이어 붙이는 패치 방식이나 일부러 무너뜨리는 등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이번 출품작은 기존 작업과 무엇이 다른가.
“비교적 작은 크기의 작품을 주로 했는데, 이번에는 큰 기물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한 달 반 동안 종이를 적셔 바르고 쌓는 일을 반복하며 작품을 키웠다. 섭씨 1250~1280도의 고온 가마에 넣으면 작품이 수축하는데, 워낙 커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밤새 가마 앞을 지켰다. 다음 날 꺼내보니 작품이 무너진 채로 나왔다. 처음에는 ‘한 달 반의 노력이 날아갔다’고 실망했지만, 그 형태가 오히려 재미있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동안 작품에 붙여왔던 ‘아티스틱 스트라텀’ 대신 ‘스트라타 오브 일루전’라는 제목을 붙였다.”

-무너진 형태를 실패로 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내 작업의 장점은 소성이 끝난 뒤에도 가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이가 타고 남은 자리가 다공질이기 때문에 깎고 다듬을 수 있다. 도자기는 한 번 굽고 나면 변형되거나 금이 가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상식처럼 통한다. 나는 그런 틀을 깨고 싶었다. 무너짐이나 변형도 작품의 한 과정이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작품 무게만 약 50㎏에 이른다. 재료는 얼마나 되나.
“키친타월만 86롤을 썼다. 흙물을 충분히 머금으면서도 찢어지지 않고 잘 쌓이기 때문에 키친타월을 쓴다. 다만 흙은 학생들이 쓰다 남기거나 버리는 백자 흙을 수거해 재활용했다. 내 작업은 이물질이 섞여도 괜찮기 때문이다.”

-작품의 색은 어떤 방식으로 결정하나.
“미리 계획하진 않는다. 종이를 적실 슬립을 만들 때 색을 정하고, 모든 레이어에 다른 색을 쓴다. 옆에 어떤 색을 배치할지도 작업하면서 결정한다. 형태 또한 어떤 부분은 접힌 채로 두고, 어떤 부분은 나중에 깎는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블루와 화이트가 겹친 부분을 깎았을 때 나온 마블링 무늬가 좋았다. 구운 뒤 그라인더로 깎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한 것이 튀어나오면, 자연에서 특이한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기쁘다.”

-조각보처럼 보일 정도로 한 작품 안에 여러 색이 담겼다. 전통 색감 등 한국적 코드를 적용했나.
“한국적 정서를 억지로 넣으려 하진 않는다. 본능적인 감각을 따르는 편이다. 내 안에 내재된 것이 나도 모르게 나올 수는 있겠지만, 국가나 문화 코드를 따로 의식하진 않는다. 다만 좋아하는 축구 유니폼의 특이한 색 조합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함께 일하는 갤러리스트들의 색에 대한 제안을 반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색을 쓰게 됐다.”

-작업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마지막에 작품 표면을 갈아낼 때다. 종이 작업을 할 때는 단순한 반복 작업 시간이 길어 사실 힘들다. 하지만 가마에서 나온 뒤 표면을 갈아낼 때 속살이 드러나는 느낌이 있다. 감춰져 있던 가치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즐거움이 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에는 몇 번째 도전인가.
“세 번째다. 그만할까 했는데, 함께 작업하는 작가들과 선생님들이 이번 작품을 다시 내보라고 권해 용기를 냈다.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현시점에서 공예를 가장 아름답게 조망하고, 전 세계 작가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이라고 생각한다. 상금만 주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프로모션하는 시스템도 인상적이다. 한국에도 이런 구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승을 예상했나.
“공모전은 내 작업의 중요한 기점이 돼왔다. 교수로 재직하면서부터는 참여할 수 있는 공모전이 많지 않지만,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그럼에도 꼭 도전해보고 싶었다. 이번에는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을 때부터 조금 기대가 있었다. 한국 작가들이 함께 이 무대에 올랐다는 것 자체도 좋았다.”

싱가포르 국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올해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는 오는 5월 13일부터 6월 14일까지 이어진다. 전시는 박 작가의 수상작을 비롯해 전 세계 최종 후보 30명의 작품을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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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로에베 크래프트 어워드의 최종 후보에 오른 6명의 한국 작가들. 맨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수현·이종인·이소명·성코코 작가와 우승자 박종진 작가, 박지은 작가. 사진 로에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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