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드라마 제목 길어야 살아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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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 포스터. 사진 tvN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이상 JTBC),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tvN)…

최근 종영했거나 방영 중인 드라마 제목이다.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 지 모를 정도로 길다.

‘취사병 전설이 되다’(tvN), ‘오늘도 매진했습니다’(SBS), ‘사랑을 처방해 드립니다’(KBS2) 등의 드라마도 제목이 하나의 문장 형태다.

긴 드라마 제목이 트렌드가 되고 있다. ‘모래시계’, ‘첫사랑’, ‘가을동화’, ‘청춘의 덫’ 같은 추상적인 명사 제목은 추억이 됐다.

드라마 제목이 설명문처럼 길어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유튜브, 숏폼 등 쏟아지는 콘텐트 속에서 직관적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끌기 위해서다.

예전에는 드라마 제목이 시청률과 직결되는 요소는 아니었지만, 요즘은 다르다. 시청자가 제목만 보고도 어떤 스토리와 장르인지 알 수 있게 해야 콘텐트 홍수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이 방송가에서 보편화되고 있다.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나 핵심 설정이 담긴 로그라인(영화나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를 관통하는 짧은 문장)이 그대로 드라마 제목이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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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취사병 전설이 되다' 포스터. 사진 티빙

11일 방영을 시작한 밀리터리 판타지 드라마 ‘취사병 전설이 되다’가 대표적이다. 요리라곤 라면 끓이는 것 밖에 모르는 흙수저 출신 신병 강성재(박지훈)가 갑자기 생긴 능력 덕분에 최고의 취사병으로 거듭나는 내용이다. ‘취사병’과 ‘전설’, 두 단어 만으로 내용 전개를 예측케 한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다섯 글자 성공 법칙 등 짧은 드라마 제목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시청자가 숏폼 콘텐트에 익숙해지다 보니, 드라마 또한 한 문장의 제목으로 내용을 설명해줘야 관심을 끌 수 있게 됐다”고 분석했다.

‘모자무싸’(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선업튀’(선재 업고 튀어, tvN), ‘슬의생’(슬기로운 의사생활, tvN) 등 드라마 제목을 짧게 줄여 부르는 문화는 젊은 시청층의 언어 유희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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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부터 JTBC에서 방영 중인 토일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한 장면. 사진 스튜디오 피닉스·SLL·스튜디오 플로우

공 평론가는 “줄임말을 즐기는 젊은 세대가 제목을 스스로 줄이는 경우도 있지만, ‘모자무싸’처럼 제작진이 사전에 만들어 확산시키는 사례가 더 많다”면서 “줄인 제목이 팬들의 동질감을 강화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웹툰, 웹소설 원작 드라마가 양산되는 것도 드라마 제목이 길어지는 이유다. 웹 기반 콘텐트 시장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문장형 제목을 사용하는 트렌드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원작의 인기를 등에 업고 가야 하는 드라마 또한 긴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취사병 전설이 되다’ 뿐 아니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ENA), ‘조폭인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웨이브),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넷플릭스), ‘선배, 그 립스틱 바르지 마요’(JTBC) 등도 웹 콘텐트 원작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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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의 한 장면. 사진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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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 포스터. 사진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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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JTBC 제공]

긴 제목에 대중이 갈구하는 키워드, 즉 시대의 욕망을 담는 것도 눈에 띈다. ‘미혼 남녀의 효율적 만남’의 경우 로맨스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효율’이란 단어가 제목에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연애조차 시간과 에너지, 감정 낭비를 최소화해 최적의 조건을 찾으려 하는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서울 자가’, ‘대기업’, ‘건물주’, ‘매진’ 등도 우리 사회의 대중적 욕망을 민낯 그대로 드러낸다. 모두가 지향하지만, 쉽게 닿을 수 없는 욕망의 단어들을 드라마 제목으로 내세우는 건, 그만큼 현실이 퍽퍽하고 불안하다는 방증이다. ‘무가치함’이란 단어 또한 인간의 가치를 성과와 효율의 잣대로 재단하는 현대 사회의 그늘을 상징한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제목만 봐도 은퇴를 앞둔 중년 회사원의 고뇌, 부(富)를 향한 세속적 욕망과 좌절이 느껴질 정도로 요즘 드라마 제목이 대중 정서와 사회적 함의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면서 “‘무가치함’이란 파격적인 단어를 채택할 정도로 과감해지는 것도 결국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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