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0.01초 줄이려 아빠들 밤 샌다…스마트폰 잠재운 ‘미니카 손맛’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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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경기 광교신도시의 한 복합쇼핑몰 광장. 구불구불한 플라스틱 트랙 앞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이 한 손에 미니카를 들고 섰다. 짧은 신호음과 함께 미니카는 트랙을 시속 30km로 질주했고, 곧 여기저기서 박수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인상적인 건 아빠와 아이들이 머리를 맞대며 튜닝에 열중하고, 열광하는 모습이다. 스마트폰 게임도, 콘솔 게임도 넘쳐나는 시대. 왜 이들은 여전히 작은 드라이버를 쥐고 미니카를 손수 조립하고 있을까.
2024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린 타미야 미니카 아시아 챌린지 현장. 사진 한국 타미야
이 현장을 만든 브랜드는 ‘타미야’다. ‘쌍별’ 로고로 익숙한 타미야는 1946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목재 모형 회사로 출발했다. 전차·항공기 등 플라스틱 프라모델을 거쳐 1982년, 조립과 튜닝이 가능한 사륜구동 미니어처 자동차를 선보이며 세계적 종합 모형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80년 동안 수많은 장난감 브랜드가 사라졌지만, 타미야는 지금도 신제품을 내놓고 수천 명이 참가하는 국제 대회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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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문은 쉽고 탈출은 어렵다
타미야 미니카의 매력은 ‘조립 이후’부터 시작된다. 기본 미니카는 1~2만원대. 설명서대로 조립하면 초보자도 1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용자들은 완성된 차를 곧바로 뜯어 고친다. 타미야에는 수백 종의 튠업(성능 개선) 부품이 있다. 모터·기어·롤러·브레이크·배터리는 물론이고 공기 저항을 줄이는 각종 안정화 부품까지 세분돼 있다. 모터 출력을 바꾸면 속도가 달라지고, 롤러 각도를 조정하면 코너링이 바뀐다. 0.01초를 줄이기 위해 수십 시간을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 “입문은 쉽고 탈출은 어렵다”는 말이 마니아들 사이에서 나오는 이유다.
건전지로 움직이는 4륜 구동 방식의 타미야 미니카. 사진 한국 타미야
이런 장난감 답지 않은 타미야의 정교함을 떠받치는 건 집요한 품질 철학이다. 일본 모형 업계의 전설로 통하는 타미야 슌사쿠 회장은 미니카 개발 당시 “접착제 없이도 조립 가능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어린이도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설명서는 단순 장난감 안내서라기보다 공학 도면에 가깝다. 대회장에서 만난 A(36) 씨는 “사용자들 사이에서 직접 개발한 세팅 노하우를 공유하는 엔지니어링 문화가 있다”며 “부품을 매만지며 최적값을 찾는 재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홍대 타미야 매장 전경. 한국 타미야는 미니카·프라모델·RC카·공작 키트·도료·공구 등 약 6000여 종에 이르는 제품을 취급하고 있다. 이소진 기자
문방구 앞 ‘미니카 키즈’, 아빠 돼서 돌아왔다
타미야에도 위기는 있었다. 2000년대 온라인 게임과 모바일 콘텐트가 급성장하면서 문방구 중심의 미니카 문화는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일본 경제산업성 공업통계조사에 따르면 프라모델 출하액은 1989년 약 465억엔에서 2007년 113억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프라모델 시장 규모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1990년대 ‘달려라 부메랑(1994)’, ‘우리는 챔피언(1998)’ 등 미니카 소재의 만화영화에 열광했던 세대가 이제 아빠가 돼서 돌아오고 있다. 한국 타미야의 30·40 고객 비중은 최근 4년 사이 57%에서 70.6%까지 늘었다. 국내 키덜트 시장은 2014년 5000억원에서 2020년 1.6조원으로 늘었으며 향후 11조원까지 확대될 전망이다(한국콘텐트진흥원).
이들은 자녀 세대도 견인하고 있다. 타미야 홍대점을 찾은 강태현(42) 씨는 “어릴 적 형과 타미야 미니카 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여전히 그 문화가 이어지고 있어 놀라웠다”라며 “아이와 함께 미니카를 조립하며 놀기 위해 방문했다”고 말했다.단순한 추억 소비만이 아니라 강 씨처럼 아이와 함께 즐긴다는 명분도 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설렘을 자녀와 함께 재현하고 추억을 대물림하는 과정은 자기 만족이 우선인 다른 키덜트 문화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한국 타미야의 핵심 소비층인 30·40세대 비중은 지난 5년간 13.6% 확대됐다.
디지털 시대, 역주행하는 아날로그 ‘손맛’
타미야의 흥미로운 지점은 디지털 중심인 시대 흐름과 정반대로 움직인다는 데 있다. 모바일 게임과 OTT 콘텐트는 즉각적인 보상이 핵심이지만, 타미야는 느리고 번거롭다. 세팅에 실패하면 미니카는 트랙 밖으로 튕겨 나가고, 기록 단축을 위해서는 반복적 테스트가 필요하다. 알고리즘이 아니라 시행착오가 중요한 취미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오히려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디지털 피로도가 높아지는 시대, 미니카처럼 손으로 조립해 직접 달리게 하는 ‘핸즈온 모터 스포츠’ 경험은 다른 방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감각을 건드린다.
지난 3일, 광교에서 열린 타미야 미니카 대회에서 가족 단위 고객들이 미니카를 튜닝하고 있다. 이소진 기자
커뮤니티 문화도 타미야의 매력을 지탱하는 힘이다. 타미야에는 모터 세팅과 안정화 노하우를 공유하고, 다른 사람의 차를 관찰하며 배우는 문화가 형성돼 있다. 트랙을 둘러싼 오프라인 만남이 희소한 경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세대 폭이 넓다는 점도 특징이다. 한국 타미야 관계자는 “8세 어린이와 50대 참가자가 같은 규칙으로 경쟁할 수 있는 취미는 흔치 않다”며 “모든 세대가 같은 트랙 위에 선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대회 현장에서는 어린이의 미니카가 성인 참가자를 꺾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타미야 미니카 아시아 챌린지(2024). 다양한 연령대의 선수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사진 한국 타미야
칠성사이다가 타미야를 찾는 이유
물론 건담이나 포켓몬같은 콘텐트 IP 사업과 비교하면 미니카 시장은 확장성면에서 제한적이다. 게임과 애니메이션, 굿즈 소비로 이어지는 캐릭터 산업과 달리 타미야는 어디까지나 조립과 주행 자체의 재미에 기반을 둔 아날로그적 취미이기 때문이다. 슌사쿠 회장은 생전 한 인터뷰에서 “프라모델의 본질은 만드는 즐거움에 있다”며 캐릭터 산업보다 품질 경영을 강조했다.
2024년 현대자동차는 IONIQ 5 N을 출시하면서 타미야와 미니카를 제작하고 경주 이벤트를 열었다. 사진 한국 타미야
타미야는 대신 ‘문화 브랜드’ 전략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차체 디자인에 패션·캐릭터 IP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현대자동차의 아이오닉 5 N과 아반떼를 미니카로 만들고 대회 이벤트를 개최하거나 자동차 문화 브랜드 피치스와 함께 어린이날 팝업을 열기도 했다.
롯데칠성음료는 2022년 로고 리뉴얼 당시 타미야와 협업해 미니카 팝업을 열고, MZ세대를 겨냥한 다양한 굿즈를 선보이며 ‘품절 대란’을 일으켰다. 오래된 브랜드의 역사성과 특유의 아날로그 문화가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원하는 기업들에게 매력적인 자산이 된 셈이다.
2025년 패션브랜드 아이앱 스튜디오(IAB STUDIO)와의 협업. 미니카 ‘코멧츠’와 의류 굿즈를 선보이며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줬다. 사진 한국 타미야
전미영 트렌드코리아컴퍼니 연구위원은 “최근에는 나이와 성별 등 기존 소비자 구분 기준이 희미해지는 ‘옴니보어’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며 “타미야의 소비 행태처럼 기존의 고정된 취향이나 세대 구분을 벗어나, 자신의 관심사와 경험을 중심으로 제품을 소비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작은 드라이버를 쥔 손은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 타미야는 그 감각을 80년째 설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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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브랜드는 개인의 가치관을 담는 중요한 소비 기호죠.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하는 브랜드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기획자들을 만납니다. 남다른 브랜드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따라 가며 설레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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