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매직패스 금지 호소, ‘상처받지 않을 권리’ 과잉 아닌가

본문

btbd43138dfe630582936988bc95b2400b.jpg

문소영 논설위원

지난 어린이날 무렵, 롯데월드 매직패스 논란이 소셜미디어를 달궜다. 발단은 일반 대기줄에서 한 시간을 기다리던 아이가 유료 우선 탑승권인 매직패스를 쓰고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저 사람들은 왜 새치기해?”라고 물었다는 글이었다. 글쓴이는 “엄마가 무능력해서 미안하다”며 “대통령님이 서민들 박탈감을 느끼는 매직패스 같은 시스템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초등학생 박탈감 막겠다고
상장 시상·운동회도 사라져
과보호는 회복탄력성 훼손
과한 정신폭력 선별 규제해야

bt3fc639cdccfcc5d96242a74b62e192fc.jpg

‘매직패스’ 논란이 일어난 롯데월드 전경. [뉴스1]

새치기인가, 경제적 선택인가
반응은 엇갈렸다. “돈을 내고 시간을 사는 정당한 거래를 왜 새치기라 하나” “비행기 비즈니스석도 없애 달라 할 건가”라는 반박이 많았다. 반면 “동심의 공간에서 아이들이 일찍부터 경제적 차이를 맛봐야 하느냐”는 공감도 있었다. “매직패스 이용자가 먼저 들어가면 일반 대기줄은 길어진다. 내 시간을 빼앗아 그들에게 주고, 놀이공원은 그 차익을 얻는 것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이렇다. 시간은 돈과 마찬가지로 희소한 자원인데 사람마다 돈과 시간의 상대적 가치는 다르므로 그 차이를 상품화한 것이 매직패스다. 돈보다 시간이 아까운 사람은 매직패스를 사고, 시간보다 돈이 아까운 사람은 일반 줄을 선다. 물론 일반 이용자의 대기시간이 늘어나는 부정적 효과가 있어 “내 시간을 빼앗는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입장료가 일괄적으로 더 비싸지는 것을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수요 초과로 인한 극심한 혼잡을 줄이는 효과적인 방법은 입장료 일괄 인상인데, 매직패스는 그 대신 소비자에게 돈을 더 낼지, 시간을 더 들일지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이다.

매직패스는 이미 20년 전에 도입됐고 디즈니랜드 등 다른 놀이공원에도 흔한 시스템인데 왜 새삼 논란이 됐을까. 최근 주식 등 자산 가격 급등으로 격차가 확대되면서 한국 사회가 상대적 박탈감에 더 예민해진 탓도 있다. 그러나 더 깊은 변화는 따로 있다. 박탈감, 소외감, 차별받는 느낌, 모욕감 같은 주관적 상처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그것을 제도나 사회적 공론으로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문화가 커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우려도 크다. 논란의 매직패스 글은 “박탈감이 들어서 울적하다”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이 막아달라”고 요구까지 했기에 소셜미디어에서 반발이 컸다. 사기업의 상품이며 필수재도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공공기관, 특히 아이들의 공간인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박탈감 방지’가 제도화되고 있다. 성적 우수상은 물론 ‘칭찬 스티커’처럼 경쟁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는 시상 문화가 사라지는 초등학교가 늘고 있다. 상장을 주더라도 다른 학생들 앞에서 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 아이가 상을 못 받아 상처받는다” “왜 아이들을 경쟁시키느냐”는 민원 때문이다. 운동회도 청군·백군을 나눠 승패를 가르기보다 ‘놀이체험형’으로 바뀌고 아예 안 하는 학교도 늘고 있다. 반 친구들끼리의 사적 생일파티까지 박탈감을 유발한다며 자제시키는 학교도 있다. 갈등도, 패배도, 격차도 없는 정서적 무균실을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bt278de8c95a8bbf6283df9808810489df.jpg

지난해 10월 인천 어느 초등학교의 운동회 모습. [뉴시스]

미 대학가의 미세공격 논란
한국 학부모가 유난히 진상이어서 그럴까? 10년 전 미국 대학가에서는 ‘미세공격(Microaggression)’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사소하고 무의식적 언행이라도 상대의 정체성이나 결핍을 건드리면 정서적 가해 즉 미세공격이라는 견해다. 명문 UC 버클리의 강사 교육 자료에는 “가장 똑똑하고 자격 있는 학생이 입학해야 한다”는 말조차 미세공격의 예시로 제시됐다. 소수자가 처한 구조적 불평등을 외면하고 능력주의를 맹신한 발화라는 것이다. 또한 어느 대학에서는 휴가 계획을 묻는 게 경제적 박탈감을 일으키는 미세공격이라며 자제를 권하기도 했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와 그레그 루키아노프는 저서 『나쁜 교육』(2018)에서, 사회학자 브래들리 캠벨과 제이슨 매닝은 『피해자 중심 문화의 부상(The Rise of Victimhood Culture)』(2018·한국어 번역본 미출간)에서 이 흐름을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물리적 안전 침범을 넘어 정서적 불편까지 ‘위해’로 간주하고, 이를 개인의 숙고나 당사자 간의 대화보다 제도와 행정 절차, 제3자의 개입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다. 하이트는 이런 ‘안전주의’가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출발했지만, 결과적으로 작은 갈등과 실패를 견디는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킨다고 본다.

그렇다고 정서적 피해를 가볍게 보자는 뜻은 아니다. 한국 사회는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학교와 군대, 직장에서 물리적 폭력까지도 ‘기강’이나 ‘성장 과정’으로 묵인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욕설·모욕·따돌림·갑질 등의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면 오히려 나약한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2004년 학폭법 지정 및 개정, 2019년 근로기준법에 직장내 괴롭힘 금지 조항 신설 등은 그런 관행을 제도적으로 끊어낸 중요한 진전이었다. 피해자가 “상처받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 문화는 분명 우리 사회를 더 인간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문제는 그 감수성이 과잉 제도화될 때다. 지속적인 모욕이나 따돌림 같은 인격과 생존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제도가 단호히 막아야 할 객관적 위해다. 그러나 매직패스나 학교 상장, 운동회가 박탈감을 준다는 이유로 타인의 자유로운 선택과 일상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특히 아이들이 달리기에서 꼴찌를 하고, 상을 못 받아 속상해하는 경험은 지워야 할 상처가 아니다. 좌절을 인정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정서적 맷집을 기르는 삶의 면역 체계다. 학교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구성원들을 정서적 무균실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더라도 스스로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해를 끼치는 정신적 폭력과 단순한 불편감을 구분하고 제도적으로는 전자만을 규제해야 한다.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규제의 기준을 가장 상처받기 쉬운 사람의 감정이 아니라 법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일반인’ 혹은 ‘평균인’의 판단에 두어야 한다. 반 아이들이 한 명을 향해 소셜미디어로 욕설·비방을 하는 것은 합리적 일반인이 볼 때 명백한 폭력이다. 반면에 운동회에서 승패를 가리는 것은 그렇지 않다. 소수 학부모의 민원이나 교육자의 판단에 휘둘릴 일이 아니다. 상처 없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선의가 결국 자유도 없고, 다양성도 없고, 경쟁으로 인한 발전도 없는 사회를 만들지 않도록, 이제 우리는 상처를 없애는 법보다 상처를 견디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44,573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