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폭등에 심상찮은 볼리비아 시위…남미 좌우 진영 각축장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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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반정부 시위가 국내 충돌을 넘어 남미 외교전으로 번졌다. 토지권 침해 우려에서 시작된 시위가 경제난에 대한 분노와 맞물리며 전국적 봉쇄 사태로 이어지더니 콜롬비아 좌파 정부와 아르헨티나 우파 정부까지 끼어들면서 남미 좌우 진영 대립의 각축장으로 비화했다. 20년 가까운 좌파의 장기 집권을 끝내고 화려하게 등장한 로드리고 파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취임 6개월 만에 최대 정치 위기에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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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시위대가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안데스 고지대 수도 고사시키는 전국 봉쇄

20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매체 엘데베르 등에 따르면 이 나라 곳곳의 고속도로와 주요 간선도로는 시위대가 설치한 바리케이트 등으로 막혔다.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곳은 해발 3600m에 자리한 행정 수도 라파스다. 안데스 고지대 지형 특성상 외부 도로망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라파스는 일주일 넘게 이어진 도로 봉쇄로 식료품, 연료, 의료용 산소 공급까지 차질을 빚고 있다. 환자가 응급차로 병원에 가지 못해 숨진 사례도 나왔다. 가디언은 이번 시위와 봉쇄로 최소 4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이번 사태의 직접적인 불씨는 농지법 1720호였다. 소규모 농지를 중규모 농지로 전환해 은행 대출 담보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이 원주민과 소농의 토지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반발을 불렀다. 그간 소규모 농지는 사고팔기 어렵도록 되어있었는데, 이를 담보로 쓸 수 있게 되면 대출을 못 갚을 시 땅을 빼앗기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을 거라 본 것이다.

파스 대통령은 반발이 커지자 지난 13일 법을 폐기했지만 시위는 오히려 커졌다. 경제난 때문이었다. 파스 정부는 지난해 11월 출범 직후 만성 재정난, 달러 부족, 연료난을 수습하겠다며 고강도 긴축과 보조금 축소에 나섰다. 그 결과 기름값이 폭등했고 체감 물가가 상승하며 반정부 여론이 커졌다. 여기에 이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급등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외화 부족에 시달리는 볼리비아로선 국제유가 상승이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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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라파스에서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EPA=연합뉴스

광부의 다이너마이트까지 가세…좌파 지도자와 권력투쟁 성격도

시위 조직이 다양해진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유가 폭등의 직격탄을 맞은 운송노동자연맹이 시위에 가세하며 견고한 도로 봉쇄망이 형성됐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교사 노조와 공공부문 노동자도 합세했다.

특히 강력한 조직력을 지닌 광산 노동자 조합이 합류하면서 시위 양상은 더욱 과격해졌다. 광부들은 도심 한복판과 의회 주변에서 연일 소형 다이너마이트 폭약을 터뜨리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정치투쟁의 성격도 띠고 있다. 볼리비아 좌파의 상징인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과 그 지지층은 이참에 파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과 관계 복원, 시장 중심 개혁 등 우파 기조를 전면에 내세운 파스 대통령으로선 권력의 향방을 놓고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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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현지시간) 볼리비아 라파스 무리요 광장 인근에서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콜롬비아는 비판, 아르헨은 지원…남미 좌우 외교전으로

여기에 주변국들이 나서며 사태는 더욱 커졌다. 콜롬비아 좌파 정부의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은 지난 17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파스 정부의 시위 진압 방식을 공개 비판했다. 그는 “영세 원주민과 농민들의 정당한 생존권 요구를 공권력의 물리력으로 탄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모독이자 심각한 인권 침해”라며 “볼리비아의 인민 봉기는 지정학적 오만에 대한 대가”고 날을 세웠다. 이에 격분한 볼리비아 정부는 내정간섭이라며 엘리사벳 가르시아 콜롬비아 대사에게 외교 직무를 종료하고 떠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우파 정부가 집권 중인 아르헨티나는 파스 정부 편에 섰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볼리비아 정부 요청에 따라 군용 수송기 C-130을 보내 식량 등 물자를 지원했다. 이들 국가가 ‘남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중남미 특유의 정치·문화적 특성 때문이다. 언어와 역사를 한 뿌리에 둔 중남미 국가들은 주변국의 정치지형 변화에 비교적 쉽게 영향을 받아 이를 매우 민감하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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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구스타보 페트로 콜롬비아 대통령이 노동절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다시 반격에 나섰다. 밀레이 정부가 투입한 군용기가 시위 진압 장비와 병력 이동에 이용되는 등 우파 정부들이 서로 협력해 민중 봉기를 탄압하고 있다는 게 모랄레스 전 대통령의 주장이다.

개각 카드 꺼낸 파스…시위 전선 진정은 미지수

이 과정에서 콘도르 작전이 언급되면서 성난 민심에 기름을 부었다. 콘도르 작전은 1970~80년대 아르헨티나·칠레·볼리비아·우루과이·파라과이 등 남미 우파 군사정권들이 미국 지원 아래 좌파 인사와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했던 공조 체계를 뜻한다. 모랄레스 전 대통령은 “현대판 콘도르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파블로 키르노 아르헨티나 외교장관은 “허위 정보에 불과하다”며 중남미 좌파 세력의 전형적인 체제 흔들기 수법이라고 반박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파스 대통령은 20일 내각 전면 개편 카드를 꺼내 들며 민심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정치투쟁과 외교전으로까지 확대된 시위 전선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관측이 적지 않다. 로이터통신은 “파스 대통령이 개각 방침을 밝혔지만 시점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내놓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즉각적인 파급력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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