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능청맞은데, 질문 던진다…베니스 홀린 통영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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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 ‘관계’가 베니스에서 열린 심문섭 회고전 ‘자연이 조각하다’ 첫머리를 장식했다. [사진 가나아트]
큰 종이를 전시장 벽에 붙인 뒤 중간 부분을 아무렇게나 찢어서 바닥에 펼쳐 놓고 그걸 돌멩이 네 개로 눌러 놓았다. 마치 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종이가 찢겨 떨어져 내린 것처럼.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당시 서른 살 심문섭이 내놓은 ‘관계(장소)’다. 당시 파리비엔날레 위원회에 심문섭을 소개한 이우환은 그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쓴 바 있다.
“표현이란 일부러 하는 짓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심문섭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른다. 얼른 보기에는 모티프나 수법이 모두 그럴싸하게 능청맞다.”
이탈리아 베니스의 카 파카논에 이 ‘능청맞은’ 작품이 나왔다. 리알토 다리 인근 옛 우체국 건물 2층에서 심문섭 회고전 ‘자연이 조각하다’가 9월 30일까지 열린다. 1973년 파리 비엔날레 출품작부터 고향 통영의 자개장으로 지난해 만든 ‘반추’까지 50여년에 걸친 예술세계를 밀도 있게 펼쳤다.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맞아 삼성문화재단과 가나문화재단의 후원·협력으로 마련된 전시다.
지난 7일 전시장에서 만난 심문섭(83)은 “베니스 비엔날레란 것이 전통이 하도 두텁고 시장이 크기에 예술가들이 성지순례처럼 꼭 들러야 하는 의례통과 같은 기분이 있다”며 “밀린 숙제하듯, 50년간 해 온 일을 되돌아보고 새로 문제 제기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모니터에 비친 대나무와 실제 대나무를 병치한 ‘반추’(2010). [사진 가나아트]
심문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조각의 개념을 근본부터 재정의해왔다. 한국 실험미술 1세대를 대표하는 아방가르드(AG) 운동에 참여했고, ‘반(反) 조각’ 개념을 내세우며 조각을 단순한 입체물이나 기념비적 형상이 아닌 존재와 관계, 생성의 과정으로 확장해 한국 현대조각사의 방향을 새롭게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971년을 시작으로 파리 비엔날레에 세 번 연속 참가했으며, 이후 상파울루 비엔날레(1975), 시드니 비엔날레(1976), 베니스 비엔날레 병행전시(1995·2001) 등 주요 국제전에 꾸준히 초청됐다.
베니스 카 파카논에서 지난 7일 개막식에 참석한 올리비에 케플랑 프랑스 매그 재단 전 디렉터(오른쪽)와 심문섭. 권근영 기자
심문섭은 1943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65년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했다. 그는 “학교에서는 서구 조형 논리를 배웠다. 여기서 일탈하고 싶었다”고 돌아봤다. 1973년 파리 비엔날레에 내놓은 ‘관계(장소)’에 대해서는 “조그만 행위로 커다란 세계가 얻어진다면 그처럼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손으로 종이를 조금 뜯어 놓았다”며 “그것은 벽을, 세계를 열어젖힌 행위로 평가받으며 독일의 미술지, 그리고 미국 아트 인 아메리카에서 신선하게 다뤘다”고 덧붙였다.
12장의 천을 사포로 문질러 해지게 한 1975년작 ‘현전(Opening Up)’은 그렇게 되고야 말 시간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며 시간의 침식과 상처의 감각을 드러냈다고 평가받았다. 1988년엔 올림픽을 준비하며 재건축으로 폐기된 목재가 많이 나왔다. 심문섭은 이 버려진 나무를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나무 고유의 리듬을 존중하며 자연 스스로 말하게 했다. 그에게 ‘목신 작가’라는 별명을 안긴 ‘목신(木神)’ 시리즈는 나무 안에 어떤 신이 깃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서 나무가 이미 신성하다는 선언이다. 2010년대 들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작가는 깊은 푸른색 추상화 ‘제시’를 통해 고향 통영 앞바다로 돌아간다. 그는 “깊은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근원적 푸른색이 하늘에서 내려와 부서지는 욕망의 하얀색과 만나 출렁인다”며 “바다와 파도는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이 연속성은 무한에 가깝다”고 말했다.
버려진 자개장이 배 타고 베니스까지 항해해 온 듯한 모습의 신작 ‘반추’(2025). [사진 가나아트]
전시장 한가운데는 가공하지 않는 나무 위에 자개장 반쪽이 놓였다. 근작 ‘반추’(2025)다. “통영은 자개가 유명하다. 버려진 자개장을 주워, 통영 앞바다에서 베니스까지 항해해온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오는 10월 통영에 심문섭 미술관을 개관하는 그는 “통영에서 태어났기에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어릴 적 바다에서 길어온 이미지로 꿈의 항해 일지를 써 온 심문섭. 7일 전시 개막에 참석한 올리비에 케플랑 프랑스 매그 재단 전 디렉터는 “심문섭의 작품은 그가 남해에서 태어나 파도의 들고남을 보며 컸음을 상기시킨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경이로움에서 경이로움으로 옮겨가며 우주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게 한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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