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기술 넘어 감성으로 시계를 빚다”…캐서린 레니에의 반클리프 아펠 시계 철학 [더 하이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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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하이 주얼러이자 워치메이커인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이 지난 4월 열린 ‘워치스&원더스 제네바’ 시계 박람회에서 다시 한번 ‘시간의 시학(Poetry of Time)’을 이야기했다.
올해 이들이 제시한 주제는 ‘천상의 시(Poetry of the Heavens)’.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과 천천히 차오르는 달, 강렬하게 떠오르는 태양의 움직임을 작은 손목시계 안에 담아내며 우주의 흐름과 인간의 감정을 시적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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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반클리프 아펠의 신작 '미드나잇 데이 앤 나잇 페이즈 드 룬' 워치의 조립 과정. 블랙 어벤추린 글라스로 만든 디스크 위에 금과 머더 오브 펄로 각각 만든 해와 달이 회전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이얼 위에서 그 모습을 보여준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반클리프 아펠의 워치메이킹은 일반적인 하이엔드 시계 브랜드들과는 결이 다르다. 복잡한 기능과 정밀성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시간을 감정과 서사, 예술성이 결합된 환상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메종 특유의 이러한 철학은 올해 신제품 곳곳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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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데이 앤 나잇 페이즈 드 룬' 워치의 낮 동안의 모습(왼쪽)과 밤의 모습. 디스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회전한다. 하루에 1회전 하는 셈이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새로운 컬렉션의 중심에는 ‘미드나잇 데이 앤 나잇 페이즈 드 룬’ 워치가 있다. 해와 달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드러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다이얼 아래 정교하게 장식한 회전 디스크로 구현한 작품이다. 여기에 매달 29.5일 주기로 변화하는 문페이즈 기능까지 더했다. 버튼을 누르면 작동하는 ‘온디맨드 애니메이션’ 기능도 갖췄다. 사용자가 원할 경우 한낮에도 달의 움직임을 감상할 수 있다.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반클리프 아펠 워치메이킹 팀은 4년에 걸쳐 새로운 무브먼트를 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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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데이 앤 나잇 페이즈 드 룬' 워치의 제작 과정. 우주의 신비를 서정적으로 풀어낸 것이 특징이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하지만 반클리프 아펠에게 기술은 언제나 목적이 아니다. 브랜드가 만들어가는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박람회 현장에서 만난 캐서린 레니에(Catherine Renier) 반클리프 아펠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시계를 제작할 때 하이 주얼리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접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브랜드에 중요한 것은 스토리텔링이며, 기술은 그 스토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며 “정교한 무브먼트는 다이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에나멜링과 스톤 세팅 같은 예술 공예를 통해 시계를 하나의 작은 무대로 만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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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레니에 반클리프 아펠 최고경영자 겸 회장. 2003년 브랜드가 속한 리치몬트 그룹에 입사한 그는 20여 년간 반클리프 아펠에서 일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그에 의하면 반클리프 아펠의 워치메이킹은 단순히 시간을 읽는 기능적 도구가 아니라, 감정과 상상력을 전달하는 예술적 오브제에 가깝다. 실제로 브랜드는 오랫동안 사랑과 자연, 무용, 요정, 천문학 같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워치메이킹을 전개해왔다. 2006년부터 이어져 온 ‘포에틱 컴플리케이션’ 컬렉션은 이러한 철학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라인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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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에틱 컴플리케이션의 대표작 중 하나인 '레이디 아펠 퐁 데 자모르' 워치와 시계 제작 과정. 사진 반클리프 아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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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반클리프 아펠이 발표한 새로운 모델 중 일부. 왼쪽부터 '미드나잇 에르 디씨 앤 에르 다이에' 워치, 밤하늘을 연상시키는 어벤추린 글라스 다이얼이 특징인 '뻬를리 워치', 사파이어로 세팅한 양쪽 날개를 열면 다이얼이 드러나는 '루도 시크릿 워치'. 사진 반클리프 아펠

또 다른 신제품인 ‘미드나잇 에르 디씨 앤 에르 다이에’는 2곳의 시간을 한 번에 보여주는 듀얼 타임 기능을 시적으로 해석한 작품이다. 두 개의 숫자 창은 서로 다른 지역의 ‘시’를 표시하고, 매시 정각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의 ‘분’ 디스플레이는 여행의 흐름을 우아하게 드러낸다. 검붉은 와인을 연상시키는 앰버 브라운 에나멜 다이얼 아래에는 브랜드 고유의 마름모꼴 피케 패턴과 방사형 기요셰 장식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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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에르 디씨 앤 에르 다이에' 워치. 점핑 아워, 레트로그레이드, 듀얼 타임 등 복잡한 기능을 구사함에도 메커니즘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수공 기요셰 장식와 에나멜 기법으로 완성한 다이얼이 아름답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이 다이얼을 완성하는 과정 역시 하나의 예술 공예에 가깝다. 장인들은 다이얼의 깊은 색감을 구현하기 위해 500°C 이하 저온에서 에나멜을 도포한 뒤, 1000°C가 넘는 고온에서 두 차례 소성한다. 이처럼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이 작업은 메종이 장인정신과 수작업의 가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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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데이 앤 나잇 페이즈 드 룬' 워치(왼쪽)와 '레이디 르트루바이 셀레스트' 워치를 착용한 모델. 사진 반클리프 아펠

레니에는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기계식 시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그는 기능적 도구의 역할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시대일수록 기계식 시계의 가치는 감성적이고 문화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고 봤다. 또한 “오늘날 시계의 진정한 가치는 장인정신과 섬세한 수작업, 그리고 작품이 전달하는 감정에서 비롯된다”며 “기술만으로는 영원성을 만들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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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오디너리 다이얼 컬렉션의 '레이디 렁콩트르 셀레스트' 워치(왼쪽)와 '레이디 르트루바이 셀레스트' 워치. 각종 공예 기법으로 완성된 다이얼에서 브랜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이런 생각은 ‘엑스트라오디너리 다이얼’ 컬렉션의 신제품 ‘레이디 렁콩트르 셀레스트’ ‘레이디 르트루바이 셀레스트’에서 엿볼 수 있다. 견우와 직녀 설화에서 영감을 받아 두 연인의 만남과 재회를 다이얼 위에 구현한 모델로, 여러 가지 방식의 에나멜링과 미니어처 페인팅, 주얼 세팅 등 각종 공예 기법이 시계 하나에서 어우러진다. 특히 프롱 같은 금속 구조물 없이 에나멜 위에 직접 스톤을 세팅하는 ‘에나멜 세팅’ 기술은 스톤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를 위해 메종은 2년에 걸친 연구개발 과정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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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멜 위에 직접 스톤을 세팅하는 '에나멜 세팅' 작업 과정. 금속으로 고정하지 않은 덕에 공중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며 원석의 광채를 살릴 수 있다. 특허 받은 기술이다. 사진 반클리프 아펠

반클리프 아펠이 최근 가장 많은 공력을 쏟고 있는 또 하나의 분야는 ‘엑스트라오디너리 오브제’ 컬렉션이다. 탁상시계와 예술품(오브제)의 경계를 허물며 동시대 파인 워치메이킹 분야에서 독자적인 흐름을 만들어냈다. 지난해 선보인 ‘플라네타리움’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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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출품작인 '플라네타리움' 오브제(왼쪽)와 제작 과정. 사진 반클리프 아펠

레니에는 엑스트라오디너리 오브제를 “기존 시계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내기 어려웠던 창의성과 장인 정신, 제작 노하우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결과물”이라고 설명했다. 거대한 조형물에 가까운 만큼 제작 과정 역시 복합적이다. 스톤 부서, R&D 팀, 시계 공방 및 주얼리 워크숍 등 메종 내부의 모든 전문 인력이 협업해야만 완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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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워치스&원더스 제네바' 박람회 내 반클리프 아펠 부스 현장. 사진 워치스&원더스 제네바

그렇다면 CEO로서 브랜드를 이끌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일까. 이에 레니에는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끊임없이 창의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흐름에 흔들리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브랜드를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래야만 반클리프 아펠이 지닌 풍부한 유산을 지키는 동시에, 그것을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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