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죽은 상권 아니었나”…‘꾸꾸족 천국’ 된 동대문시장 5층 정체 [비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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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9번 출구. 역과 바로 연결된 동대문종합시장 A동의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환한 조명 아래 알록달록한 세상이 나타난다. 각종 플라스틱 소재 장식부터 비즈·코르사주·리본·체인 등 의류에 쓰이는 부자재를 전문으로 다루는 시장이다.
28일 찾은 서울 종로구 동대문종합시장 5층. 액세서리 부자재 상가가 밀집한 곳으로 평일 늦은 오후에도 쇼핑객들로 분주했다. 유지연 기자
옷이나 액세서리를 만드는 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지나칠 법한데 요즘은 각종 ‘꾸미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지난 28일, 평일 오후에 들른 부자재 상가는 흰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손톱 크기의 작은 장식을 골라내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주말이면 통로 이동이 어려울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꾸꾸’ 트렌드 계보, 젤리슈즈가 잇는다
최근 동대문 액세서리 부자재 상가의 새로운 히어로 아이템은 젤리슈즈다. 1990년대를 풍미했던 투명하고 말랑한 소재의 PVC 여름용 샌들 말이다. 벌집 모양 구멍이 나 있어 각종 비즈나 장식을 달아 나만의 젤리슈즈를 만들려는 이들이 많다. 이날 젤리슈즈 꾸미기 아이템으로 이름난 상점에서 만난 대학생 임모(21) 씨는 “SNS에서 젤리슈즈 꾸미기 과정을 올린 게시물을 보고 재밌어 보여서 나도 해볼까 하고 왔다”며 “예쁜 장식이 많아서 한참 골라야 할 것 같다”며 웃었다.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동대문에 젤리슈즈를 꾸미기 위한 각종 장식을 구매하러 오는 이들이 많다. 유지연 기자
젤리슈즈의 인기는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돼 올해 절정을 맞고 있다. 2000년대 초기 스타일로 회귀하려는 ‘Y2K’ 트렌드에 힘입어 당시 인기였던 투명 젤리슈즈가 재소환됐다. ‘더로우’‘클로에’ 등 하이 패션 브랜드에서 젤리슈즈를 선보이고, 걸그룹 아이브·배우 이시영 등이 젤리슈즈 스타일을 선보이면서 화제가 됐다. 가볍고 습기에 강해 여름 시즌에 특히 주목받았다.
실제로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를 운영하는 카카오스타일에 따르면 젤리슈즈 인기는 고공행진 중이다. 지난 4월 1일부터 5월 27일까지 약 두 달간 젤리슈즈의 거래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2배(2182%) 폭증했고, 검색량은 4배 이상(445%) 늘었다. 예년 대비 빠르게 찾아온 초여름 날씨에 여름 신발 수요가 증가했다는 분석이다.
젤리슈즈 인기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 바로 장식이다. 크록스 신발에 지비츠(Jibbitz·꾸미기 부품)를 달아 자신만의 신발로 만드는 데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 젤리슈즈 꾸미기에 나선 것이다. 인스타그램·틱톡 등에 젤리슈즈 꾸미기 과정을 올리는 콘텐트들이 늘었고, 관련 게시물도 증가 추세다. 29일 기준 인스타그램에는 젤리슈즈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5만 개를 넘어섰다.

SNS 등 온라인에서도 젤리슈즈 꾸미기 콘텐트 수요가 높다. 사진 인스타그램 화면 캡처
꾸미기 성지로 거듭난 동대문
사실 이런 트렌드는 지난 몇 년간 꾸미기 대상을 바꿔가며 이어져 왔다. 가방에 다는 참(장식)으로 나만의 가방을 만들더니, 지난해에는 볼펜 꾸미기가 대세였다. 비즈 장식이나 플라스틱 장식, 홀로그램 스티커 등을 볼펜에 더하는 방식으로 나만의 볼펜을 만드는 식이다. 여기에 키 캡(키보드 스위치 덮개) 꾸미기 등이 가세하면서 10대부터 초등학생 아이의 손을 이끌고 방문하는 중년층까지 동대문이 붐비기 시작했다.
꾸미기 유행은 ‘다이어리 꾸미기’에서 파생했다. 이후 가방, 키링으로 대상이 옮겨가고 있지만 기성품에 나의 취향을 더해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큰 맥락은 비슷하다.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만족감을 주는 데다, SNS에 공유하기 좋은 콘텐트라는 점도 인기의 한 요인이다.
동대문 부자재 상가는 꾸미기 트렌드의 최대 수혜지다. 다이어리 꾸미기에서 파생한 꾸미기 트렌드는 볼펜 꾸미기, 가방 꾸미기, 키 캡 꾸미기, 키링 꾸미기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지연 기자
이 트렌드를 타고 새롭게 떠오른 동대문은 대표적 B2B(기업 간 거래) 상권으로 일반 소비자보다는 전문 업자들의 발걸음이 잦은 곳이다. 한때 패션 성지로 이름을 날리던 동대문 일대는 온라인 쇼핑의 발달, 관광객 감소와 함께 2000년대 이후 소비자의 발걸음이 크게 줄었다. 여기에 코로나 19를 거치면서 대형 패션몰에 공실이 느는 등 ‘죽은 상권’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이런 동대문이 최근 꾸미기 트렌드에 힘입어 ‘꾸꾸(꾸미고 꾸미기)의 성지’로 다시 활기를 더하고 있는 것이다.
동대문 상권은 오프라인이 무기다. 작은 장식을 직접 눈으로 보고 구매할 수 있다는 장점, 워낙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의 상품이 한 데 몰려 있어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원하는 모양을 만들기 위해 이리저리 조합해 보는 등 온라인은 충족시켜줄 수 없는 오프라인 쇼핑의 재미를 새삼 만끽할 수 있다. 부자재 상가가 밀집한 동대문종합시장이 최대 수혜지지만 건너편 신발 상가와 패션 상가, 인근의 창신동 완구 거리까지 그 열기가 번지는 추세다.
“구경 가볼래?” 구도심 테마 상권 뜬다
이런 흥행은 동대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구제 시장의 메카로 떠오른 동묘, 관광객까지 가세하면서 전통 시장을 넘어 패션·뷰티 매장까지 속속 문을 열고 있는 광장시장, 어린이들만이 아니라 추억을 소비하는 ‘어른이’들까지 몰리는 창신동 완구 거리 등 구도심 테마 상권이 주목받고 있다.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완구거리 풍경. 재미와 경험을 찾아 방문한 '어른이'들이 많다. 유지연 기자
이들의 공통점은 한때 흥했다가 온라인 쇼핑의 발달로 가라앉은 상권이라는 점이다. 온라인 쇼핑이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자리 잡은 뒤에야 이 상권들은 쇼핑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끌고 있다. 물건을 정해두고 이곳에 들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살지 정해두지 않고 우선 보러 가는 식이다. 쇼핑이라기보다 나들이고, 목적형 쇼핑이 아니라 발견형 쇼핑이다.
남신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코리아 리테일 임차자문팀 이사는 “요즘 젊은 소비자들이 맛집 탐방하듯이 혹은 데이트 코스로 동대문이나 창신동, 광장 시장, 동묘 구제 거리를 찾고 있고, 이런 일종의 놀이 문화가 SNS를 타고 퍼지고 있다”며 “이들 거리는 한국의 로컬(현지) 문화가 무척 강한 특징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까지 가세해 주목할 만한 거리로 재탄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딱지부터 종이 인형, 못난이 인형 등 1980~1990년대를 풍미했던 옛 장난감들이 가득한 '동심 쇼핑센터'의 모습. 유지연 기자
지난 28일 찾은 창신동 완구 거리에는 완구를 보러온 어린이들이 아니라 20대들이 더 많았다. 손으로 주물 거리면 긴장이 풀리는 말랑이를 체험하고, 딱지부터 콩알탄 등 어린 시절 추억의 물건들이 가득한 레트로 숍에서 사진을 찍는다. 굳이 비유하자면 전시장에 가깝다. 거리를 관람하고 문화를 구경하다가 마음에 들면 사 오는 곳. 구매는 결과지 목적이 아니다. 이번 주말 “뭐 하지?” 싶다면, 살 것이 없어도 괜찮다. 그냥 가서 구경하는 곳. 요즘 이런 오래된 거리가 살아남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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