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35만 요원으로 테러 못 막았다…'KGB 후예' 러 FSB의 굴…

본문

17124348985448.jpg

지난 2일 한 남성이 모스크바 지하도를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연방보안국(FSB)은 러시아 연방의 국가 안보, 대테러, 국경의 보호 및 방어 등 정부 정책을 실행할 권한을 가진 연방 행정 기관이다. 러시아 연방 대통령은 FSB의 활동을 감독한다”

러시아 정부 홈페이지에 나온 FSB 소개글이다. FSB는 옛 소련 정보기관이자 정치 경찰인 KGB가 모태다. 모스크바 루뱐카에 있는 옛 KGB 본부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한다. 최근 5번째 집권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도 FSB 국장 출신이다.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함구하지만, 서방은 FSB의 인력 규모가 20만~35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세계 최대 정보기관 중 하나인 FSB가 최근 “심각한 정보 실패”(알렉산더 버시바우 전 주러시아 미국 대사)의 대명사가 되고 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이 금방 끝날 거라 오판한 데 이어, 14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지난달 22일 모스크바 외곽 크로커스 시청 공연장 테러도 막지 못했다. 심지어 미국 정부로부터 테러 발생 2주 전 크로커스 시청이 테러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통보를 받고도 대처하지 못했다(워싱턴포스트).

17124348986779.jpg

박경민 기자

17124348988113.jpg

2004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베슬란학교 인질 사건의 희생자가 있는 병원을 방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17124348989467.jpg

2006년 영국 런던에서 전 FSB 요원 리트비넨코가 독극물 테러로 숨졌다. [중앙포토]

“수조 루블 예산 헛되이 쓰여”

러시아 안에서도 FSB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러시아 출신 정치 분석가 블라디슬라프 이노젬체프는 “이런 규모의 테러 공격이 발생했을 때 러시아 보안군이 테러리스트 행동을 어떤 식으로든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독특하다”며 “수년간의 보안 강화와 수조 루블의 예산이 헛되이 쓰였다”고 꼬집었다.

서방에선 FSB의 실패 요인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내놓았다.

“FSB는 지난 2월 크렘린 손에 사망한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지지자들을 괴롭히느라 바빴다. 평화적인 소셜 미디어 사용자들을 반체제 사상 범죄로 감옥에 가두고 점령지에서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을 박해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유럽정책분석센터 선임연구원 안드레이 솔다토브와 이리나 보로간)

“강력한 스파이 능력과 악명 높은 방첩 부대를 보유했음에도 FSB는 우크라이나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엉터리 평가를 내놨다. 디지털 감시 파놉티콘을 유지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검거하고, 성소수자 단체의 ‘극단주의’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이슬람 국가 같은) 극단주의 위협에 대해선 무방비로 노출됐다. 정치적 외관을 유지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다른 일에는 치명적으로 무능해졌다.”(가빈 와일드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선임연구원)

17124348991176.jpg

지난달 23일 러시아 시민들이 테러 공격이 벌어진 크로커스 시청 공연장 앞에서 슬퍼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러시아는 야당 운동, 여호와의 증인, 페이스북 모회사인 메타를 포함해 1만4000명 이상의 개인과 단체를 극단주의자로 규정해 알카에다 같은 단체와 동등한 지위에 놓았다. 이들 모두를 감시하는 것이 FSB 임무다.”(포린폴리시 지난달 27일 보도)

뉴욕타임스(NYT)도 지난달 28일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다른 글로벌 정보 기관에 대한 불신, 정치적 반대파와 우크라이나 파괴 행위가 FSB의 우선순위가 됐다는 점, 러시아 대선 기간 동안 ‘특별히 경계’한 이후의 피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FSB가 테러를 막는 데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성소수자 감시 등에 에너지 소모” 

러시아 당국은 이같은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2008년부터 FSB 수장을 맡고 있는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국장은 “(미국이 제공한 테러 예고 정보는) 일반적인 성격의 정보였다”고 깎아내렸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도 “우리의 특수부대(FSB 등을 지칭)는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했다”고 했다. 러시아 보안에 서방의 도움이 필요한지 묻는 질문엔 “우리의 특수부대는 독립적으로 일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17124348992661.jpg

지난달 26일 알렉산드르 보르트니코프 FSB 국장이 모스크바의 러시아 검찰청에서 열린 확대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고양이와 쥐의 게임…냉전 때보다 심화”  

전문가들은 이번 테러 이후 FSB의 정보활동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푸틴 대통령은 2일 “우리는 반드시 (테러를) 궁극적으로 지시한 사람들을 찾아낼 것”이라고 했다.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도 FSB 등의 보고에 기반해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고수하고 있다.

러시아가 최근 스파이 네트워크를 강화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6일 ‘유럽이 푸틴의 스파이를 쫓아냈다.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는 기사에서 “러시아는 서방과의 스파이 전쟁을 공격적으로 다시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최근 독일 장교들이 우크라이나에 순항 미사일을 보내는 것을 논의한 전화 통화를 러시아가 공개한 것이 그 예다.

한 서방 정보국 장교는 “고양이와 쥐의 게임이 다시 돌아왔다”며 “러시아 활동은 냉전 시대와 비슷하거나 심지어 심화됐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로 망명한 러시아 군 조종사 막심 쿠즈미노프가 스페인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도 그런 신호로 본다.

17124348994108.jpg

모스크바 공연장 테러 용의자가 지난달 25일 지역 법원에서 FSB 요원에게 끌려가고 있다. AP=연합뉴스

특히 유럽에선 6월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러시아 스파이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유럽 극우 정치인들이 푸틴의 급여를 받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는 지난달 27일 언론매체 ‘유럽의 소리’와 두 명의 친크렘린 우크라이나 정치인을 국가 제재 목록에 올렸다. 이들이 유럽 정치인들에게 돈을 전달해 친러시아 목소리를 내게 했다는 의혹과 관련해서다.

알렉산더르 더크로 벨기에 총리도 지난달 28일 “러시아가 선전전을 촉진하기 위해 유럽의회 의원들에게 접근했을 뿐 아니라 돈도 지불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2일엔 오스트리아 정보기관 출신 스파이가 자국 경찰청장 휴대전화에 저장된 정보 등을 러시아 측에 넘긴 정황이 드러나 체포됐다.

FT는 “러시아 스파이의 우선순위는 서방의 비밀을 훔치고, NATO 내 분열을 확대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약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유럽 국가들은 600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추방했는데, 그 중 약 400명은 스파이로 추정됐다.

최근엔 약 150명의 러시아 요원이 외교관 신분 등으로 위장해 활동 중이고, 러시아 정보 활동의 3분의 1이 비엔나와 제네바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러시아의 비밀 작전에는 정치, 비즈니스, 조직 범죄에 종사하는 다양한 외국인이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17124348995454.jpg

박경민 기자

앞서 유로뉴스는 러시아 스파이 네트워크를 4가지 범주로 설명했다. ▶외교관으로 가장해 외국 대사관에서 일하는 러시아 스파이 ▶러시아가 전환시켰고 정보 제공 대가로 돈을 받는 관료 또는 정치인 ▶겉으로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러시아 출신 비밀요원 ▶잠복 스파이 세포다.

이중에서도 ‘잠복 스파이 세포’는 기다리고 관찰하다 표적이 될 사람들에게 접근을 시도한다. 지난해 8월 러시아 스파이로 적발된 불가리아인 3명은 병원 운전사, 실험실 조교, 사업가 등이었다.

171243489968.jpg

박경민 기자

전문가들은 과거 FSB가 국내 방첩 업무를, 대외정보국(SVR), 군사정보국(GRU)이 국외에서 활동하는 정보기관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의 경우 FSB가 전면에 나서는 등 역할 구분이 달라졌다고 본다.

핀란드국제문제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 라이호 니즈니카우는 유로뉴스에 “러시아 시스템은 정보기관들이 서로 견제하고 통제할 수 있도록 영역을 모호하게 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임무를 맡고, 주목을 받으려 경쟁한다는 설명이다.

0
로그인 후 추천을 하실 수 있습니다.
SNS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2,869 건 - 1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