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GOD 윤계상? 가수 이름 같아 기억"…그렇게 찾은 독립운동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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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윤계상(본명 윤원식) 선생 묘비에서 손자인 윤동균씨(왼쪽부터)와 증손녀 민영씨, 윤씨 아내 이화연씨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윤 선생 사후 102년 만인 지난달 18일 그의 후손들이 묘지를 찾았다. 윤 선생 묘는 미국 하와이 코나 지역의 한 커피농장에 있다. 사진 국립창원대

“평생 소원 이뤘다”…80대 손자의 눈물

지난달 18일 오전 11시(현지시각)쯤 미국 하와이 빅아일랜드 코나 지역. ‘코나 커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 한 커피 농장 인근 대나무숲을 찾은 한 80대 노인이 눈물을 흘렸다. 울산에 사는 윤동균(82)씨였다. 울먹이는 윤씨 앞에는 군데군데 푸른 이끼가 낀 비석(세로 45㎝·가로 32㎝·폭 16㎝)이 있었다. “故 尹桂相 墓(고 윤계상 묘)”이라고 새겨진 윤씨 할아버지 묘비였다. 윤씨는 연신 “하나님. 찾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렸다.

윤씨에게 ‘조부 찾기’는 인생 과업이었다. 열 살 때 작고한 아버지가 “너희 할아버지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무덤이 거기 있으니 찾으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다. “할아버지께 누(累)가 될까. 어렵게 살아도 나쁜 짓 한 개도 안 하고 살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7000㎞ 넘게 떨어진 하와이행도 결심했다. 조부 묘가 있는 하와이 대숲은 습하고 이끼가 많아 미끄러웠다. 모기도 들끓었다. 고령인 윤씨가 찾아가기엔 만만찮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 통증이 있는 무릎에 주사까지 맞고 하와이 땅을 밟았다.

이날 윤씨는 조부 묘에서 아내 이화연(78)씨, 둘째 딸 민영(51)씨와 함께 기독교식 예배를 올렸다. 묘비에 윤씨 부부와 자녀·사위·손주가 함께 찍은 사진도 놓았다. 딸 민영씨는 8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온 가족이 모여 할아버지를 보내는 장례식을 치른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윤씨는 “평생소원을 이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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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하와이 빅아일랜드 코나 지역의 한 커피농장에서 발견된 고 윤계상(본명 윤원식) 선생의 묘비. 윤 선생은 국립창원대 박물관 연구진 조사 결과, 하와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밝혀졌다. 사진 윤민영씨

하와이서 독립운동…일본 말 안 듣는 ‘불령선인’

하와이 한인 독립운동가 윤계상(본명 윤원식) 선생은 이렇게 후손과 만났다. 세상을 떠난지 102년 만이다. 8일 국립창원대 박물관에 따르면 윤 선생은 1867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05년 38세에 여객선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에 혼자 이민을 했다. 고향에 아들과 부인을 남겨둔 채였다. 윤 선생은 하와이에서 독립운동 중심 단체인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총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을 했다.

당시 하와이 호놀룰루 일본 영사관에서 윤 선생을 ‘불령선인’(일본 말을 따르지 않는 조선인)으로 지목해 조선총독부에 보고할 정도였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하와이에 한인여학원·한인기독교회를 세워 하와이 한인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또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 한인 이주 노동자를 위한 일자리 마련에도 힘썼다.

실제 1902년 12월부터 1905년까지 한인 노동자 7400명이 하와이로 이주,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농막에서 잤다고 한다. 이런 고달픈 이국 생활에서도 하와이 이민 1세대는 한인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자금도 모았다. 장인환·전명운 의사 의연금(1908년), 안중근 의사 의거 구제 의연금(1909년)도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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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남 이승만 자료집'에 담긴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창설지도자 사진 중 윤계상씨 모습. 자료 국립창원대

“GOD 윤계상, 혹시 그분?”…대학·후손의 집념

윤 선생은 1922년 54세에 사망했다. 묘소를 기억하는 이도 모두 숨져 잊힌 사람이 됐다. 그러던 중, 창원대 박물관 연구진이 2019년부터 하와이 한인 묘비를 조사, 윤 선생 묘비를 찾아냈다. 잊힌 하와이 1세대 삶을 되살리기 위해 500여기 묘비를 탁본해 자료를 수집한 대학과 조부 묘를 꼭 찾겠다는 후손의 집념이 이뤄낸 성과였다.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윤씨가 창원대 박물관에 연락한 것은 2년 전이다. 2022년 언론을 통해 창원대 박물관 전시(잊힌 이야기, 역사가 되다-하와이 이민 1세의 묘비로 본 삶의 궤적) 소식을 접하고서다. 윤씨는 조부의 본명인 ‘윤원식’ 묘비가 있는지 물었지만, 박물관 자료에서 나오지 않았다. 묘비에 ‘윤계상’으로 적혀 있었던 탓이다.

윤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듬해(2023년) ‘파평윤씨’ 족보를 구해와 박물관 측에 건넸다. 박물관 연구진은 족보에서 윤 선생의 자(字)가 ‘계상’이란 사실을 확인됐다. “(묘비 조사할 때) 가수 GOD 윤계상과 이름이 같았던 묘비가 딱 떠올랐다. 그분도 출신이 경북 안동이었다”고 김주용 창원대 박물관 학예실장은 회상했다. 그런데 이번엔 한자가 달랐다. 족보에는 ‘繼(이을 계)’, ‘常(항상 상)’이었는데, 묘비에는 ‘桂(계수나무 계)’, ‘相(서로 상)’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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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 족보(왼쪽)에 ″자(子) 원식(元植) 자(字) 계상(繼常″이라고 적혀 있다. 자료 국립창원대

족보·묘비 ‘사망일자’ 일치…독립유공자 추서

하지만 족보에 음력으로 기재된 윤 선생 사망일자(1922년 5월 23일)가 묘비에 양력으로 적힌 1922년 6월 18일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이에 연구진은 한자가 다른 것은 단순 표기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하와이에서 활동한 윤계상과 윤원식이 동일 인물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당시 일제가 윤 선생을 불령선인이라고 작성한 자료에도 동일 인물임에도 한자 표기가 달리 적혀 있었다. 1905년 하와이행 배편인 ‘시베리아호’ 명부상에는 윤원식이란 이름이 정확히 기재돼 있기도 했다. 김주용 학예실장은 “이승만·안창호 관련 서신에서도 대한인국민회 총부회장을 역임한 윤계상 이름이 나오는데 족보와 한자가 정확히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윤씨는 여러 공적 사실을 바탕으로, 지난해 10월 국가보훈부에 조부를 독립유공자로 추서했다. 윤씨 가족은 “나라를 위해 이렇게 애쓰셨단 사실도 이번 창원대 조사로 알게 되어 온 가족이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며 “묘소를 찾게 해준 창원대에 감사드린다”고 전했다.

박민원 창원대 총장은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잃어버린 역사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운동가 희생과 헌신을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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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국립창원대학교 박물관 학예실장이 햇볕에 검게 탄 손으로, 고 윤계상(본명 윤원식) 선생의 묘비를 탁본한 자료를 가리키고 있다. 안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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