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북한군 ‘헬북조선’ 탈출기…립밤 바른 추격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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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구교환이 북한군 장교 역할로 이제훈과 호흡 맞춘 영화 ‘탈주’가 한국영화 중 흥행 1위에 올랐다.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한국 영화 중 박스오피스 1위 ‘탈주’(3일 개봉)는 북한군 청년들의 ‘헬북조선’ 탈출기다. 넷플릭스 글로벌 히트 드라마 ‘D.P.’ ‘기생수’의 주연을 맡아 흥행 스타로 떠오른 구교환(41)이 이번엔 극장가 흥행에 앞장섰다. 탈북을 감행하는 주인공 규남(이제훈)보다도 북한 현실과 더 갈등하는 인물이 그가 연기한 추격자 현상이다. 현상은 북한군 엘리트 장교라는 가면 아래 가린 러시아 유학생 출신 피아니스트란 정체성을 버리지 못했다. 함경도 명사수 출신 현상은 어릴 적 알고 지낸 규남에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다. ‘탈주병을 처단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인다.

주인공 규남보다 더 고뇌하는 추격자는 자칫 짧은 상영시간(94분)의 영화에서 걸림돌로 느껴질 법한데 ‘탈주’는 그 반대다. 구교환 특유의 유연한 연기가 목표 지향적인 영화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현상이 (검거에 실패한) 부하한테 ‘지금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라’고 말하죠. 스스로한테 하는 말 같았어요. 현상이 옷이나 자세에 자꾸 각을 만드는 건 불안감의 표현이라 생각했죠.” 개봉 직전 서울 삼청동에서 만난 구교환은 “현상을 반은 차갑게, 반은 뜨겁게 연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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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환은 동료 배우들에게 신뢰 받는 비결로 “상대역도 나라고 생각하며 연기한다”고 밝혔다.

구교환은 연기도 평소 모습을 닮았다. 일필휘지보다는 캐릭터를 모호한 부분까지 담아내는 세밀화 같다. ‘탈주’에선 립밤 바르는 현상의 입술이 얼굴보다 먼저 등장한다. 오랜만에 만난 규남 앞에서 물휴지로 싱겁게 장난친다. 각본을 겸한 이종필 감독은 “구교환이니까 생각한 설정들”이라며 “물휴지 장면은 촬영 전날 구교환 배우가 제안했다.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있지만, 오랜만에 만난 규남과 놀고 싶었던 게 아닐까. 현상이란 캐릭터를 관통하는 행동이었다”고 말했다.

먼저 캐스팅된 이제훈이 구교환을 상대역으로 점찍었다. 구교환이 현장에서 유독 사랑받는 이유를 이 감독은 “촬영하면서 본인이 엄청 행복해한다. 즉석에서 대본을 변주해 연기한다. 그런 에너지를 주고받는 재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촬영은 생물 같다”는 구교환은 “어떤 작품이든 내 역할뿐 아니라 상대역도 나라고 생각하며 연기한다. 그게 앙상블”이라며 “생각보다 즉흥적이진 않다. 장면의 큰 뼈대를 먼저 그리되 감정을 열어두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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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작 ‘꿈의 제인’에서 구교환은 트랜스젠더 제인을 연기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상업 데뷔작인 좀비 영화 ‘반도’, 대표작 ‘D.P.’ 시리즈,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아신전’, 북한 보위부 요원 역할의 영화 ‘모가디슈’, 그리고 ‘탈주’까지 이른바 ‘구교환 밀리터리 5부작’이다. 트랜스젠더 연기로 신인상을 휩쓴 ‘꿈의 제인’, 키보드워리어를 연기한 ‘우리 손자 베스트’ 등 다채로웠던 독립영화 시절보다 아쉽다는 반응도 있다. 그는 “현상은 군인이라기보다는 청춘이다. 농담처럼 자칭 ‘밀리터리 덕후’란 말도 했지만, 사실 신분(군인)보다는 그 사람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자칫 정형적일 수 있는 군인 역을 매번 살아 숨 쉬게 만든 그만의 비결이다.

상업영화계에선 ‘신인’으로 통하지만, 올해로 데뷔 17년 차다.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나와 윤성현 감독의 단편 ‘아이들’(2008)로 데뷔했다. 직접 연출·각본·주연을 맡은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2014), 연인 이옥섭 감독과 공동 연출한 ‘연애다큐’(2015), 가수 이효리가 동물애호가로 등장한 ‘사람냄새 이효리’(2022)에서 보여준 생활형 연기는 추종자를 양산했다. 그는 다만 “저 스스로는 ‘독립영화 시절’이란 말을 안 쓴다. 저는 계속 ‘영화 작업’을 해왔을 뿐”이라고 말했다.

구교환은 주연작 외에도 여성 킬러의 연하 애인(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학원생 아이들을 납치해 놀게 한 죄로 체포된 청년(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등 독특한 역도 연기했다. 차기작은 SF ‘왕을 찾아서’다. 로봇과 모험에 휘말리는 보건소 의사 역을 맡았다. 연기 궤도에서 탈주하고 싶은 순간은 없을까. “시나리오 쓸 때는 ‘완성’이 손에 잡히지 않아도 어떻게든 규남처럼 목표점에 도착하게 되더군요. 배우로선, 어떤 장면을 소화해내는 순간이 되겠죠. 미치도록 하고 싶은 연기가 너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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