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1000년 뒤의 서울…땅속에선 뭐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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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4년 서울의 유적지에서는 비디오테이프·기타 같은 물건이 나올 거라는 고고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대니얼 아샴의 ‘발굴 현장’. 권근영 기자

칸칸이 나뉜 바닥에 붓·채·끌 같은 발굴 도구들이 놓였다. 이 발굴 현장의 주인공은 금속활자나 도기 파편이 아니다. 분홍색·파란색 석고로 만든 워크맨, 귀퉁이가 부식된 비디오테이프, 펜탁스 K1000 카메라, 부서진 기타 따위가 이름표와 함께 소중하게 놓였다. ‘미술 고고학자’ 대니얼 아샴(44)의 신작 ‘발굴 현장’이다. 지난 12일부터 서울 송파구 롯데뮤지엄에서 열리고 있는 그의 개인전 ‘서울 3024-발굴된 미래’에 나왔다. 에비뉴엘 6층, 명품관에 있는 미술관 바닥을 도시유적박물관처럼 꾸몄다.

1000년 뒤 서울에서 유적 발굴에 나설 고고학자는 어떤 유물을 건질까. 아샴은 “지금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유물이 될 것”이라며 “모든 것은 깨지기 쉽고 부식된다”고 말했다. ‘1000년 뒤 유적지’에는 그림도 두 점 걸렸다.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투구를 쓴 아테나 여신’과 ‘3024년 북한산에서 발견된 신격화된 로마 조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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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식된 장미 석영의 마미야 M645 카메라’. [사진 롯데뮤지엄]

미래의 서울 북한산 암벽과 소나무 사이에서 달빛을 받고 선 아테나 조각상이 뜬금없다. 이 쓸쓸하고 신비로운 광경을 홀로 마주한 인물의 뒷모습은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닮았다. 장소와 시간을 뒤틀리게 해 혼란을 일으키는 게 아샴의 장기다. 그는 “내 작업의 대부분은 관객들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도록 초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1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문득 자신이 색맹이라고 털어놓았다. 단색의 석고 조각, 흑백에 가까운 톤의 회화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초기작에 색감이 배제돼 있음을 눈치챌 수 있을 거다. 이제는 안경과 교정 렌즈 덕분에 색감을 더 느낄 수 있지만 12가지 색에 번호를 매겨 그 번호로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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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과 스테인리스 스틸의 비너스 흉상’. [사진 롯데뮤지엄]

시작은 2010년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이었다. 아샴은 작업을 위해 방문한 이곳에서 유적 발굴 현장을 목격하고는 ‘상상의 고고학’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상의 물건들을 석고나 화산재로 주조한 뒤 인위적으로 부식시켜 1000년 뒤에 발굴할 유물처럼 만든다. 이렇게 해서 전시장에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시간’을 가져오겠다는 거다. 지난해 뉴욕 전시에서는 ‘3023 뉴욕’, 파리에서는 ‘3023 파리’라는 제목으로 발굴 현장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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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아샴

1992년 허리케인 앤드루를 겪지 않았다면 그는 예술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미국 마이애미를 강타한 이 재해에 집이 무너졌고 12살 아샴은 벽장에 몸을 웅크린 채 살아남았다. “건축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나 질문하게 됐다. 건축과에서는 받아주지 않아 미대를 갔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은 ‘갑작스럽게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순간, 세계의 잔해는 어떻게 보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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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정이 든 미미큐’(포켓몬 캐릭터)가 나왔다. [사진 롯데뮤지엄]

일껏 조각을 만든 뒤 훼손하고 부식시켜 낡게 만드는 그의 작업에 디오르·리모와·포르셰·티파니 등 세계적 브랜드가 다투어 협업한다. 그는 오늘날의 소비재들이 시간을 이겨냈을 때, 먼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발견될 지 묻는다. 2020년에는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감독 유야마 구니히코와 협업해 90분짜리 영상 ‘시간의 파문’을 제작했고, 이 영상과 함께 미술관 흰 벽에 ‘포켓몬 동굴’을 만들어 표면이 풍화된 피카추 석고상을 전시했다.

250여 점을 총 9개 섹션으로 구분해 보여주는 이번 전시의 첫 작품은 파리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아를의 비너스’를 본뜬 ‘푸른 방해석의 침식된 아를의 비너스’다. 17세기 프랑스 남부 아를의 고대 로마 극장의 폐허에서 발견됐을 당시, 이 조각엔 오른팔이 없었고 왼팔도 일부만 남아 있었다. 루이 14세 때 조각가 지라르동은 이 조각을 비너스상으로 추정하며 여신의 모습에 걸맞게 왼손에는 거울을, 오른손에는 사과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복원했다.

맨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을 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이 조각상은 여전히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아샴은 이 조각이 3020년에 발견됐다는 가상의 이야기를 더해 석고로 만든 뒤 훼손해 안에 심어둔 방해석을 드러냈다.

있을 법하지만 세상에 없는 장면들을 늘어놓은 그의 전시가 말하는 바는 ‘시간’이다. 10월 13일까지, 성인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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