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왼쪽)가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최고위 인사들이 하반기 순회의장국인 헝가리가 주최하는 행사에 사실상의 보이콧을 선언했다. 헝가리가 순회의장국을 맡자마자 친 러시아 성향인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는 등 EU 기존 기조와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는 데 대한 대응으로 풀이된다.

에릭 마메르 EU 집행위원회 대변인은 16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에 “헝가리의 의장국 취임 후 최근 상황을 고려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헝가리가 주최하는) 비공식 행사에 고위 공무원이 집행위 대표로 참석하도록 결정했다”고 밝혔다.

해당 행사에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나 집행위원 같은 최고위급 관리(top officials) 대신 고위 공무원(senior civil servant)이 참석하게 된다는 의미다. 마메르 대변인은 또 의장국 임기 시작과 함께 관례적으로 이뤄졌던 집행위원단의 헝가리 방문도 이뤄지지 않을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조치는 오르반 총리가 이달 1일 헝가리가 순회의장국에 오르자마자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주장하며 러시아와 중국, 미국 등을 잇달아 방문한 이후 나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오르반 총리가 부적절한 회동을 가진 데 따른 조치”라며 “EU의 많은 지도자들은 오르반의 방문에 대해 사전 정보를 받지 못해 분노했다”고 전했다. 오르반은 러시아와 협상을 통한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을 주장하면서 EU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해 EU 통합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앞서 EU 외무장관들도 헝가리가 다음 달 28~29일 부다페스트에서 여는 외무 정상회의를 보이콧할 예정이라고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가 전날 보도했다.

같은 날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정책 고위대표가 EU 공식 외무장관 회의를 열어 부다페스트에 가지 않는 계획을 프랑스·독일과 논의했고 17일 27개 회원국에 발표할 예정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헝가리가 EU를 대변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려 한다는 전언이다. 일각에선 헝가리가 의장국을 맡는 6개월 내내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15일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유럽의회에 도착하고 있다. 새로 꾸려진 유럽의회 첫 전체회의가 16~19일 열린다. EPA=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오르반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1월 대선에서 승리하는 즉시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을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날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오르반 총리는 지난 11일 미 마러라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만난 후 최근 EU 정상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과 EU의 우크라이나 지원 비용 부담 비율은 EU에 불리한 쪽으로 조정될 것”이라며 “이는 EU가 러시아와 외교 소통을 재개하고 평화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적었다. 이는 평화 협상 개시 시기를 우크라이나가 결정해야 한다는 EU의 기존 입장과 대조된다.

11일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가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르반 총리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나토(NATO) 정상회담이 끝난 뒤 이곳을 찾았다. AFP=연합뉴스

한편 유럽의회는 이날 개원해 지난달 선거에서 당선된 의원 720명이 5년 임기를 시작했다. 18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에 대한 연임 인준투표가 진행되는데, 향후 EU의 정치적 안정성에 대한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