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CIA출신 수미 테리가 국정원 요원? '제2 코리아 게이트'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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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검찰이 지난 15일(현지시간) 유력 한국계 미국인 연구자를 기소하면서 외교가에 큰 충격을 던지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외교부 관계자들이 여럿 연루된 것으로 나타나면서 자칫 한·미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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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연방검찰이 15일(현지시간)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한반도 안보 전문가인 수미 테리를 한국 정부를 대리한 혐의로 기소했다. 연합뉴스

미 연방검찰은 이날 뉴욕 남부 연방지방법원에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의 한반도 안보 문제 전문가인 수미 테리(52)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한국 정부를 불법적으로 대리한 혐의로 기소했다. 그가 복수의 주미 한국대사관 및 뉴욕 유엔대표부 소속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명품 가방과 코트, 고가의 식사 등을 제공받고 한국 측에 미 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한 비공개 회의의 내용을 전달하는 등 비위를 저질렀다는 이유에서다. 미 연방수사국(FBI)의 수사 결과, 테리 연구원은 이외에도 약 3만7000달러(약 5111만원)의 연구 지원금을 불법적으로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 출생으로 12세에 이민간 테리 연구원은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고 2001년부터 CIA에서 8년간 한국 담당 선임분석관을 지낸 인물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한국·일본·오세아니아 담당 과장과 동아시아 국가정보 담당 부차관보를 지냈고, 이후에도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 국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미국의 대아시아 및 한반도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왔다. 탈북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Beyond Utopia)’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는 등 북한 인권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여왔다. 그런 만큼 미 사법 당국은 이번 사안을 엄중하게 보는 분위기다.

FBI, 10년간 추적 수사 벌여 

중앙일보가 미 연방검찰의 공소장(총 31쪽)을 살펴본 결과, FBI는 2013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테리 연구원의 행적을 계속 추적 수사해왔다. 또 이를 토대로 여러 차례에 걸쳐 직접 신문하고 자택 압수 수색을 통해 명품 등 관련 증거와 휴대전화까지 확보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 연구원은 주미 대사관 소속 국정원 요원(파견관)과 직접 만나거나 e메일, 메신저 등으로 수시로 연락하면서 정보를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연방검찰은 각기 다른 시기에 활동한 총 세 명의 국정원 직원이 관여돼 있다면서 이들을 공소장에 'Handler'로 기록했다. 정보원을 포섭해 첩보 수집을 지시하는 담당 요원으로 봤다는 의미다. 해외 대사관에 배속될 경우 ‘백색 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공사참사관(Minister Counselor) 등의 직함을 쓴다. 검찰은 국정원 파견관의 임기가 끝날 때쯤 테리 연구원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업무를 인계한 것으로 파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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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3일 미국 워싱턴DC의 한 매장에서 국가정보원 파견관이 수미 테리 연구원에게 2950달러의 보테가 베네타 핸드백을 결제해준 후 나오는 모습이 담긴 CCTV 화면. 아래 쇼핑백을 든 사람이 테리 연구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사진 미 연방검찰 공소장 캡처

공소장에서 테리 연구원이 처음 국정원 파견관을 만난 건 2013년이다. 초기엔 뉴욕 맨해튼의 스시 식당에서 만나 한반도 관련 행사 연설문의 주제에 대해 상의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2019년 11월 두 번째 담당 파견관이 테리 연구원에게 돌체 앤 가바나 코트(2845달러·약 393만원)를 선물했다. 파견관은 구매 당시 신용카드를 사용했으며 외교관 신분을 이용해 면세 대우까지 받았다. 테리 연구원은 선물을 받고 이틀 뒤 해당 코트를 환불하는 대신 크리스찬 디올 코트(4100달러·약 566만원)로 교환했다고 검찰은 주장했다.

이 파견관은 워싱턴DC의 한 매장에서 보테가 베네타 가방(2950달러·약 407만원)도 구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은 당시 동행한 테리 연구원이 가방이 담긴 쇼핑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 찍힌 폐쇄회로(CC)TV 화면을 공소장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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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수미 테리 연구원(왼쪽)이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그리스 식당에서 국정원 파견관 2명과 저녁 식사를 하는 모습이 찍힌 화면. 임기가 끝난 파견관이 새로운 담당 파견관을 소개하는 자리였다고 미 연방검찰은 주장했다. 사진 미 연방검찰 공소장 캡처

이 외에도 검찰은 테리 연구원이 한 그리스 식당에서 파견관이 다음 담당 파견관을 소개하는 장면이 담긴 화면(2020년 8월), 세 번째 파견관이 루이뷔통 가방(3450달러·약 476만원)을 매장에서 살 때 테리 연구원이 동행하고 이후 외교 차량에 동승하는 모습 등이 담긴 화면(2021년 4월) 등도 적시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 연구원은 미슐랭 별점을 받은 유명 식당을 포함해 여러 차례 고가의 식사를 접대받기도 했다. 또 테리 연구원이 자금을 직접 관리하는 연구비 등 약 3만7000달러의 금품 수수 정황도 나타났다.

신고 없이 한국 대리한 게 문제 

검찰은 테리 연구원이 한국 측으로부터 이 같은 향응과 금품을 받은 대가로 미 정부 고위 관계자를 소개해주거나 한국 측 주최 행사에 참여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뉴욕타임스(NYT)를 포함한 미국과 한국의 유력 매체에 기고하는 칼럼을 쓸 때도 한국 측 입장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가장 문제시여기는 대목은 테리 연구원이 이처럼 한국 정보기관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관련 당국에 정식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을 통해 민간인이 외국 정부나 기관을 위해 일할 경우 관련 당국에 신고하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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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코리아소사이어티 주최 '비욘드 유토피아' 상영회에서 공동 제작자인 수미 테리 박사(왼쪽 세 번째)가 발언하고 있다. 왼쪽부터 레이첼 코언 공동 제작자, 탈북민 북한 인권 활동가 이서현씨. 연합뉴스

하지만 테리 연구원은 관련 조처를 하지 않은 채 여러 차례 미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 선서(Truth in Testimony)’를 하면서 번번이 “(FARA에 따른 등록자가) 아니다”고 밝혔다는 게 검찰 측 주장이다.

또 검찰은 테리 연구원이 국정원 직원과 접촉 중인 사실을 동료 연구원에게 공공연히 밝혔으며, 본인도 FBI와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테리 연구원이 처음 FBI와 인터뷰할 당시 매우 긴장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테리 “늑대를 끌어들였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테리 연구원이 정보기관이 포섭 대상자를 물색해 평가하는 관행을 알고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미 의회 직원들을 (국정원 직원에게) 소개한 것은 ‘늑대를 끌어들인 것’과 같은 일이었다”고 밝혔다. 검찰은 테리 연구원이 CIA를 나간 이유도 국정원과의 접촉 문제로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테리 연구원은 이런 혐의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NYT에 따르면 테리의 변호사인 리 울로스키는 “(검찰의) 주장에 근거가 없으며, 수년간 헌신해온 학자이자 분석가의 업적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 “검찰이 주장하는 ‘한국 정부의 간첩’ 시절 테리 박사는 되레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왔다”며 “사실이 밝혀지면 미국 정부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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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국정원 파견관이 루이뷔통 핸드백을 구매한 뒤 수미 테리 연구원(왼쪽)과 가게를 나와 외교 차량으로 이동하는 모습. 사진 미 연방검찰 공소장 캡처

일각에선 테리 연구원이 FBI와 인터뷰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정원 파견관을 만나 접대를 받은 게 문제를 키웠다고 본다. 익명을 원한 전직 정보기관 고위 관계자는 “FBI가 사전 경고 차원에서 인터뷰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무시하고 같은 행태가 반복됐기 때문에 기소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정원이 정보 수집 등을 위해 무리하게 로비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해외 담당)은 “과거 정보기관은 ‘코리아 게이트’로 불리는 박동선 사건(1976년) 이후 미국에서 비정상적인 로비는 자제했다”며 “국정원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코리아 게이트는 당시 한국 중앙정보부가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씨를 통해 미 의회에 전방위 불법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워싱턴포스트(WP)에 폭로되면서 한·미 간 갈등을 빚게 했던 대표적인 외교 스캔들이다. 이로 인해 당시 박정희 정부와 리처드 닉슨 행정부는 물론 이듬해 집권한 지미 카터 행정부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됐다. 일각에선 이번 사건이 정보기관의 비정상적인 활동이 문제됐다는 점에서 코리아 게이트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나온다.

외교가에선 이번 사건이 한·미 관계에 미칠 파장을 우려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한국 정부와 민간 싱크탱크 등 정보 교류가 당분간 경색될 것 같다”고 걱정했다. 서울의 한 외교 소식통도 “로비 대상이나 규모로 볼 땐 한·미간 의견 교환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사안으로 보인다”면서도 “다만, 한국과 미국 모두 국내 정치적으로 문제시하면 상황에 따라 일이 커질 수 있다”고 짚었다. 이어 “특히 미 대선 국면에서 공화당이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이슈를 키울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한 전직 해외 공관장은 “대단한 정보를 가진 것도 아닌데 한인이라고 매달리는 것은 정보기관에 어울리지 않는 촌스러운 행태”라며 “제대로 된 미국 정보선을 만들어야 국가의 정보 역량 강화에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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