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정원 허술한 활동, 미국서 공개돼 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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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기간 피고인은 등록하지 않은 채 사실상 한국 요원으로 활동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분석관 출신의 한반도 안보 전문가 수미 테리(52)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미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한국 정부를 대리한 혐의로 지난 15일(현지시간) 연방법원 재판에 넘겨졌다. 테리를 기소한 연방 검찰은 그가 10여 년간 미국 주재 한국 공관에서 근무하는 국가정보원 요원들로부터 고가의 가방과 의류, 고액의 현금 등을 받은 대가로 미국의 비공개 정보 등을 넘겨온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동맹국인 미국에서 벌여온 해외 첩보 수집 활동의 구체적 내용과 부적절한 관행이 공개되며 외교적으로 파장이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금품으로 손쉽게 정보원을 포섭해 급한 정보를 끌어모으거나 단편적으로 활용하는 데 급급할 뿐 주재국 상황 등을 고려해 정교하게 관리하지 못하는 국정원의 아마추어적 첩보 활동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17일 중앙일보가 입수한 뉴욕 남부지방검찰청 공소장(총 31쪽)에 따르면 테리의 한국 정부 대리 활동은 2013년부터 10여 년간 이어졌다.

미국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르면 외국 정부 등을 대리해 활동할 경우 법무장관에게 신고해야 하지만, 테리는 이런 규정을 알고도 신고를 누락했다. 그는 2016~2022년 최소 세 차례의 의회 증언 선서 과정에서 ‘FARA에 따른 신고 대상’인지 묻는 말에 “아니다”고 답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가 한 활동에는 한국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언론 기고 및 발표를 하거나 접근이 쉽지 않은 인사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도 포함됐다. 미 정부 관료와의 비공개 모임 등에서 획득한 정보를 넘기기도 했다.

테리는 이런 활동을 한 뒤에는 국정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 공소장에 나열된 품목은 2845달러짜리 돌체앤가바나 코트, 2950달러짜리 보테가베네타 핸드백, 3450달러짜리 루이비통 핸드백 등이다. 또 테리가 근무 중인 연구기관 프로그램을 위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기금 계좌로 3만7000달러 상당을 수수했다고 미 검찰은 설명했다.

미 검찰은 공소장에서 테리의 활동을 지시한 국정원 담당자 등의 직급까지 공개했다. 10여 년간 테리를 관리한 담당자는 3명으로, 뉴욕 유엔대표부 공사와 워싱턴DC 주미 대사관의 공사참사관 2명이라고 공소장에 적시됐다.

국정원 직원 명품숍 쇼핑 장면 CCTV 포착…직급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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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제주포럼에 참석한 수미 테리 미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 [뉴시스]

이들이 테리와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모습, 명품숍에서 물건을 산 뒤 계산하는 모습 등을 담은 폐쇄회로(CC)TV 화면이 공소장에 담겼다.

테리의 혐의에는 미 정부는 물론 의회, 연구기관에서도 불쾌해할 만한 내용이 담겼다. 대표적인 게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을 만난 뒤 테리가 내용을 국정원 담당자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당시 모임은 한반도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으로, 블링컨 장관과 국무부 고위 관료 외에 테리를 포함한 학자 5명만 참석했다. 원칙은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 ‘오프 더 레코드’였다.

하지만 테리는 국무부 청사를 나서자마자 국정원 담당자를 만났다. 담당자는 테리를 외교 번호판을 단 주미 대사관 등록 차량에 태웠고, 차 안에서 테리가 모임 중 적은 두 장짜리 메모를 휴대전화 사진으로 찍었다. 검찰은 이 사진도 공소장에 첨부했다. 테리는 조사 과정에서 모임 사실을 사전에 국정원 담당자에게 알렸다고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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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워싱턴DC의 한 명품숍에서 국가정보원 직원이 루이비통 핸드백을 구입하는 모습. [사진 미 연방검찰 공소장]

공소장은 테리의 대언론 활동도 밝혔다. 지난해 1월 국정원 담당자는 테리와 식사하며 윤석열 정부의 확장억제 강화에 대한 바람과 핵협의그룹(NCG) 창설 필요성, 미국 핵 전략자산의 활발한 전개 필요성 등을 설명했다. 테리는 이후 거의 같은 내용을 언론 등에 기고했다. 테리는 조사에서 자신에게 NCG라는 개념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이 국정원 담당자였다고 시인했다. 윤 대통령의 2023년 4월 국빈 방미를 앞두고 이뤄진 활동도 공소장에 드러났다. 대통령 방미 직전 이뤄진 한·미 싱크탱크의 동맹 관련 학술대회를 위해 테리가 소속 연구기관에서 움직였는데, 국정원 담당자는 이후 테리에게 2만6035달러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미 검찰은 테리가 정보기관이 포섭 대상자를 물색해 평가하는 관행을 알고 있었다면서 “(국정원 요원에게) 미 의회 직원들을 소개한 것은 ‘늑대를 끌어들인 것’과 같은 일이었다”고 밝혔다.

미 검찰은 테리가 국정원 직원과 접촉 중인 사실을 동료 연구원에게 공공연히 밝혔으며, 본인도 지난해 6월 연방수사국(FBI) 인터뷰에서 자신이 2008년 CIA에서 사임한 건 국정원 요원들과의 접촉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인정했다고 했다. 그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국정원 요원들을 만나 접대받은 게 문제를 키웠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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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수미 테리(왼쪽)와 국정원 관계자가 식사하는 모습. [사진 미 연방검찰 공소장]

테리 측은 혐의를 부인했다. 테리의 변호사인 리 울로스키는 뉴욕타임스에 “(검찰)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수년간 헌신해 온 학자이자 뉴스 분석가의 업적을 왜곡하고 있다”고 반발했다. 또 “검찰이 테리가 한국 정부를 대리해 활동했다고 주장하는 시절 테리는 되레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 왔다”며 “사실이 밝혀지면 미국 정부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은 “(테리의) 외국대리인등록법 기소 보도와 관련해 한·미 정보당국은 긴밀히 소통 중에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국정원이 정보 수집 등을 위해 무리하게 로비하면서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염돈재 전 국정원 1차장(해외 담당)은 “과거 정보기관은 ‘코리아 게이트’로 불리는 박동선 사건(1976년) 이후 미국에서 비정상적인 로비는 자제했다”며 “국정원이 큰 실수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코리아 게이트는 한국 중앙정보부가 재미 한국인 사업가 박동선씨를 통해 미 의회에 전방위 불법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워싱턴포스트에 폭로되면서 한·미 갈등을 빚은 외교 스캔들이다.

이번 사태로 학자적 양심과 독립성을 지키며 목소리를 내는 미국 내 지한파의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익명을 원한 워싱턴 소식통은 “한국 정부와 민간 싱크탱크 등 정보 교류가 당분간 경색될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의 외교 소식통은 “로비 대상이나 규모로 볼 때 한·미 간 의견 교환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한 사안으로 보인다”며 “다만 한·미 모두 국내 정치적으로 문제시하면 일이 커질 수 있다. 특히 미 대선 국면에서 공화당이 조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이슈를 키울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서울서 태어나 12세 때 이민…NSC 부차관보 역임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은 1972년 서울에서 태어나 12세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뉴욕대에서 정치학으로 학사 학위를, 보스턴 터프츠대 플레처스쿨에서 국제관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1년부터 CIA에서 8년간 한국 담당 선임분석관을 지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가안보회의(NSC) 한국·일본·오세아니아 담당 과장과 동아시아 국가정보 담당 부차관보를 역임했다.

이후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 윌슨센터 아시아프로그램 국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며 미국의 아시아 및 한반도 정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탈북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비욘드 유토피아(Beyond Utopia)’의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는 등 북한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왔다.

이승호 기자  xxxxxxxxxxxxxxxx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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