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요원 만나러 가는 길, 손에 든 명품백까지…"숨 쉬듯이 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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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 CFR 선임연구원, 연합뉴스

#. “북한이 최근 김정은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체연료 엔진 시험을 했습니다. 제가 이것을 게임 체인저로 보는 이유는 미국의 모니터링, 어, 그러니까 심지어는 선제타격 측면에서도 보다 취약할 수 있다는 것이죠.”

지난해 1월 10일 한반도 안보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주미 한국 대사관에 파견된 국정원 요원과 저녁 식사를 하며 나눈 대화 내용이다. 장소는 워싱턴 DC에 있는 고급 스시 레스토랑. 테리는 식사를 하면서 해당 요원의 발언 중 핵심 키워드를 자신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전송해 놓기도 했다. “고체연료 엔진 기술 완성” “정책-확장억제” 등이다. 그리고 9일 뒤 테리는 언론에 “고체연료 로켓은 탐지나 선제조치가 힘들다”며 같은 취지의 글을 기고했다.

#. 테리는 2021년 5월~2022년 5월 무렵 지속적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담당 요원과 식사했다. 2021년 5월 미슐랭 스타 스시 레스토랑, 2021년 10월과 11월 또다른 스시 레스토랑, 2022년 2월과 5월 고급 이탈리안 해산물 레스토랑 등이다. 2021년 5월 6일 테리가 담당 요원과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는 루이뷔통 가방을 든 것이 목격됐다(observed). 담당 요원이 사준 가방이다.

신고 없이 한국 정부를 대리한 혐의로 테리를 기소한 미 연방검찰의 공소장 중 일부다. 두 사람이 만난 장소는 물론이고, 둘 사이에 오간 대화, 복장까지 구체적으로 공개됐다. 대화 내용은 말하는 것을 그대로 옮긴 녹취처럼 보인다. 미 연방수사국(FBI)이 장기간에 걸쳐 얼마나 치밀하게 수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정원은 아마추어같은 접근법으로 미 수사 당국에 공작 장면을 속속들이 들켰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소장에 따르면 FBI가 테리에게 국정원과의 접촉에 대해 경고한 것은 2014년 11월이다. 공소장에 등장하는 테리와 국정원 담당 요원 간 이뤄진 첫 접촉은 2013년 8월 중순 e메일 교신이고, 테리의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는 2016년 것부터 나온다. 이 때부터 증거를 모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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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가 국정원 담당 요원과 명품샵에 함께 있는 사진. 연합뉴스

공소장에는 테리와 국정원 담당 요원이 함께 있는 다수의 사진이 등장한다. 2019년 11월 명품샵, 2021년 4월 명품샵 및 가게 앞 도로 등이다. 해당 사진들은 가게의 폐쇄회로(CC)TV로 촬영했다고 설명돼 있다. CCTV 녹화본은 저장 기한이 있는 만큼 당시 곧바로 확보한 사진일 가능성이 크다. 동선을 실시간으로 꿰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끄는 사진 2장이 있다. 우선 2022년 6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이 주재한 비공개 면담 직후 테리가 국정원 담당 요원을 만나 건넸다는 메모 사진이다. 당시 국정원 담당 요원이 테리를 차량에 태우고 차 안에서 메모를 찍었다고 돼 있는데, 해당 사진 사본이 버젓이 공소장에 포함돼 있다.

테리가 메신저로 해당 사진을 담당 요원과 주고 받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공소장에 따르면 검찰이 테리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결과 두 사람이 사용하던 암호화 메신저는 이틀 뒤에는 모든 내용이 자동 삭제되도록 설정돼 있었다. 결국 출처는 국정원 담당 요원일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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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가 미 국무장관 주재 회의 뒤 국정원 담당 요원에게 제공한 메모 사진. 연합뉴스

미 캘리포니아주 변호사 자격을 보유하고 있는 법무법인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는 “공소장에 해당 사진을 국정원 요원이 찍은 것으로 기재돼 있다면, FBI가 이를 입수할 수 있는 방법은 임의제출이거나 강제수사일 것”이라며 “후자 쪽 가능성이 커 보이는데, 어떤 식으로든 수사 과정에서 국정원 담당 요원의 휴대전화가 압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또다른 사진은 2020년 8월 테리가 국정원 담당 요원 2명과 맨하탄의 고급 그리스식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장면이다. 명품샵 사진과 다르게 이 사진에는 CCTV 촬영본이라는 설명이 없다. 실제 통상 CCTV 촬영 사진처럼 위에서 아래를 향해 찍은 게 아니라 같은 눈높이에서 찍은 구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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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 테리가 국정원 담당 요원들과 함께 식사하는 사진. 연합뉴스

테리가 루이뷔통 가방을 들고 담당 요원을 만나러 가는 걸 ‘목격’한 것처럼 미행이나 감시를 통해 촬영한 사진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한 사정기관 소식통은 “이 정도면 거의 숨 쉬듯이 감시했다고 봐야 하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감시는 증거 수집을 위한 수사 기법의 하나로, 미국에서도 법 집행 기관의 감시는 제한을 받는다. 일부 감시는 압수 수색에 준할 수 있는 만큼 영장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김성덕 법무법인 이신 대표변호사는 “통신의 자유를 중요한 기본권으로 정하고 있는 한국의 경우 국가보안법위반 등 중대범죄의 수사에 법원의 통신비밀제한조치 승인을 받고 당사자에게 통지 없이 특정한 기간 또는 범위에 따라 감청으로 증거를 수집하는 게 가능하다”며 “미국 연방검찰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이번 사건에서 장기간 치밀하게 증거를 확보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테리는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9년 1월 15일 서훈 국정원장의 방미 일정에도 관여했다고 공소장은 설명했다. 당시 테리가 몸담고 있던 연구기관, 즉 미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에서 서 원장이 참여하는 비공개 회의를 주최했다는 것이다. 해당 회의에 미 측에선 미 국방부 고위 당국자, 전직 고위 정보 관료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후에 해당 모임에 대해 “매우 비정상적이었다”고 진술했다.

해당 회의가 이뤄진 날은 김영철 당시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워싱턴 DC에 도착하기 이틀 전이었다. 결국에는 노 딜로 끝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한달 여 앞둔 시점이기도 했다. 해당 회의에서 서훈 원장은 대북 정책에 대해 설명하고, 북·미 정상 간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고 공소장에 명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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